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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명부 1번 후보 박영희 |
<약력>
1961년 강원 동해시 출생
- 전 민주노동당 장애인차별철폐운동본부 본부장
-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감사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반성폭력위원회위원
- 진보신당(준) 공동대표
<출마의 변>
한국사회는 민중들에게 점점더 가혹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가진자들과 부패한자들을 위한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점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더욱 주변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민중의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진보정치를 해나가려면 무엇보다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된 민중이 정치세력화하고 이 땅의 진보를 위해서 중요한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진보신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0년 동안 장애여성공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진보적 장애운동에 복무하면서 생존권이 없는, 이동권이 없는 장애인을 위해, 소수자를 위해 정치, 법, 제도가 왜 만들어져야하고, 어떻게 만들어져야하는가에 대한 절절한 고민은 한시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장애민중들은 장애인이동권투쟁을 통해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을 만들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해냈고 ‘장애인교육지원법’과 ‘활동보조인제도화’를 위해 끊임없이 길 위에서 투쟁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진정 민중의 삶을 위한 정치, 법,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몸으로 법조문을 쓰고 몸으로 요구하는 경험을 통해서 정치인,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여성으로서 비례대표에 나선다는 의미는 단지 장애인을 대표하거나 대리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땅에 장애민중이 놓인 위치에서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을 바라보고, 주변부로 밀려난 소수자들의 해방이 덜 중요한 것으로 밀리지 않는 진보를 향해서 나섰습니다.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를 요구했을 때 정부와 일부 시민들의 반응은 “예산이 없다, 장애인에 대한 특혜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동을 하다가 더 이상 죽을 수 없었기에 목숨 걸고 투쟁한 결과 예산이 마련되고 가능한 조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동수단에 편의시설을 갖춘 결과 노인, 어린이, 임산부, 혹은 일시적인 이유로 제약이 있는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에서 가장 배제된 사람이 인정되고 포함될 때 그것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평등할 뿐만 아니라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수자 정치가 특정한 그룹의 문제로 한정되거나, 배려와 관용의 정치로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위계를 만들어내는 지배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통해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인을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세계와 세계,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뜻하며, 좋은 정치라는 것은 세상이, 도덕이, 경제가, 권력이 서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존재들은 끝내 이어주는 노력”이라고. 저는 진보정치가 바로 그러한 ‘좋은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정치와 이어지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해방이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정치가 바로 서민의 정치이고 민생의 정치이며 소수자 정치이자 진보정치임을 확신하며 저도 그 길을 바퀴 굴려 쉼 없이 달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소개서>
장애를 가진 여성의 눈으로 소수자들과 공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박영희
모든 존재는 이유가 있다
나는 1961년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에서 1남 4녀 중에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장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사람도 사회도 없었습니다. 내가 듣는 말은 ‘엄마 죽을 때 같이 죽자’였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누구에게나 의무교육으로 평등하게 교육받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장애여성의 교육이 초등학교내지 무학정도가 68%인 것처럼 나 역시 이동권과 편의시설의 부족과 여성에 대한 교육 차별로 제도교육 경험은 초등학교 2학년밖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중증장애에 여성이면서 부모님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나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집안에서 보호라는 감옥에서 첫 외출을 하던 스물다섯살까지 읽을 수 있는 서적은 모두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이 세상 존재하는 것 어떤 것이든 이유가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후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의 존재확인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1993년 어느 날 친구가 참고서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너는 공부를 해야 해’하며 내민 초등학교 참고서가 저의 교육의 시작이었습니다. 중입검정고시 준비 삼 개월 만에 합격하고 고입검정고시 준비를 하려니 혼자서 수학과 영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장애인야학이 없기도 했지만 있어도 이동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서 방문봉사자가 절실히 필요했고 몇 분의 봉사로 고입검정고시를 삼 년 만에 마쳤습니다. 이렇게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저의 삶은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쁜 장애여성이다
1996년에 장애인단체내에 장애여성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와 같은 장애여성들을 만났고, 1997년 6월에는 미국워싱턴에서 열린 ‘국제장애여성리더십포럼’에 13명의한국대표단의 나는 단장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참여한 82개국 장애여성들의 다양한 문제들을 보면서 각 나라마다 장애여성 문제가 다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상의 몸에 대한 관점에 장애 있는 여성의 몸도 비정상이 아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관점의 변화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강한 아시아의 장애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엄청난 폭력을 당하고 있는지 말했고 인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때는 나에게 너무나 생소하기만 했던 성소수자인 장애여성들에 대한 얘기도 있었습니다.
1997년 한국에 돌아오면서 장애여성운동의 독립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와 함께 제 삶의 독립을 위해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계단 없는 집을 찾았고 같은 고민을 가진 장애여성 둘과 전세대출까지 받아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습니다.
중증장애에 경제활동도 없으면서 주변의 반대와 우려하는 것을 뒤로하고 독립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짐스러운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같이 죽을 수는 없는 것이죠. 정말 힘든 독립이었지만 2003년 어머님 돌아가실 때 나 때문에 눈을 못 감으시는 것을 보면서 ‘엄마, 걱정 안하셔도 되요. 난 이제 잘 살 수 있어요.’라고 말씀드리니까 눈을 감으셨지요. 우리의 독립을 다른 ‘거북이시스터즈’라는 다큐멘터리를 2003년에 제작하면서 장애여성의 독립을 사회에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독립하면서 장애여성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1998년 2월 우리나라 처음으로 장애여성의 독자적인 운동단체로서 ‘장애여성공감’이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여성은 평생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 ‘보호자’없이 독립한 장애여성의 삶은 유별난 것으로 취급했고, 실제로 많은 위험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저항과 연대를 만들어내는 눈동자
‘장애여성공감’, 아무도 모르는 고덕동 지하방에서 우리만의 소박한 아홉 명의 여성들의 창립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외롭고 두렵고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작이 올해 10주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은, 장애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도 노동도 권리로 주장하기 어려웠고, 가정에서도 시설에서도 폭력의 대상이 되고 인권침해의 대상으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장애여성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없는 존재로 자기정체성도 가지지 못하고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장애인일 뿐이었습니다. 장애여성운동도 그렇게 척박하였고 외롭고 늘 양손에 칼을 들고 밀림에 길을 만드는 심정으로 활동했습니다. 돌아보면 잊을 수없는 눈동자들이 있습니다. 성폭력 당한 어린 딸을 데리고 상담소를 들어서던 젊은 엄마의 눈물 그렁그렁 하던 눈과,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지만 막연히 두려움이 가득하던 지적장애딸의 눈동자, 또 장애 있는 자기를 아내로 함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20년을 폭력 속에 살았다는 어둠의 깊이를 담고 있던 중증장애여성의 눈동자, 이러한 것들 때문에 장애여성운동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눈동자를 만나고 사회와 싸우면서 이동권을 기초로 진보적 장애 대중들의 투쟁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들은 ‘교통약자를위한이동편의증진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등에대한 특수교육법’을 제정해내었고, ‘장애인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 ‘성람재단 비리척결과 사회복지사회법개정’을 추진했습니다.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등을 활동하면서 장애인의 차별을 세상속에 알려내었습니다. 또한 다름과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여성운동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에서 소수자여성의 문제와 평화문제를 다루고 여성성소수자와 장애여성이 만나 자연스럽게 때로는 영화를 만들고, 때로는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저항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거리에서 철로에서 연행되고 경찰에게 끌려나오면서, 어느 날은 장애여성을 위해 법원에 지원자로 나서면서, 어느 날은 집시법을 어겨서 법원에 들락거리는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소수자의 정치, 모두의 정치
나의 생애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고등학교과정을 삼년동안 너무 힘들게 종일 화장실한번 못가고 공부하며 다녔던 방송통신고등학교 졸업식 날, 졸업장 보다 그것은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킨 것이기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존중하고 양심에 불편함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노무현대통령이 서명하는 날 청와대에 초대받았을 때 거기서 시위를 벌렸고, 청와대에서 끌려나와 광화문 사거리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긴장이 풀리면서 감당할 수 없는 마음상태에서 서성거렸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 사회적인 기준에서 보면 함량부족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위치에서 다른 소수자들의 차별에 공감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기본적 권리조차 보장되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겨우 그 주체가 목소리를 내어 요구하면 언제나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밀려나는 경험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장애여성이 그러했고, 여성의 문제가 언제나 그래왔었습니다. 이제 더 밀어내어지지 않는 소수자의 정치를 나의 위치에서 공감해왔던 관점으로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나의 언어는 화려하지도 고급스럽지 않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의 위치에서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