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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정치를 위하여

 

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중심과 주변, 정치와 일상,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이분법의 체계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의 경험은 주변의 일로, 비정치적인 일로, 예외적이고 특이한 일로만 여겨졌다. 억압적인 사회는 우리의 요구를 단지 그릇된 이기심으로 치부했고, 이는 더 위대한 정치와 대의가 존재한다는 미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분법의 세계 속에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갈 것이다. 우리 앞에 지금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나중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따로 존재한다는 믿음, 더 중요한 정치가 존재한다는 믿음, 사회를 바꾸어낼 주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믿음이야말로 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를 이미 구성된 범주에 의지하여 호명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킬 운동을 구성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를 가둬놓기 위해 그렸던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기꺼이 그 테두리 위에 서고자 한다. 우리는 경계에 선 사람들로서 경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자유를 위한 페미니즘을 이제 시작하자.

 

존재는 끊임없이 구성된다.

사회는 장애를 가지지 않고, 이성애자이며, 가난하지 않고,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인지하는 성이 같은 이들만을 정상으로 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통하는 상식정상은 남성 중심적인 규범이며,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은 비상식적인존재들로 규정된다. 이 속에서 상식이 되지 못한 이들은 사회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없다.

 

담론과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은 없으며, 선험적인 정상과 보편 역시 없다. 때문에 비정상으로 규정되었던 존재들은 오히려 정상성이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질문들은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정상성이 권력에 의해 구성된 공허한 개념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질문들은 우리를 경계 위에 세우며 이러한 경계에서의 만남은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우리는 현 사회에서 어떤 이들에게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지, 그 절차는 얼마나 정당한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는 남성 중심적 규범들을 탈제도화하여, 모두의 평등한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방식들로 대체할 것이다. 이 과정은 여성남성의 결합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가족제도의 변화일 수도 있고, 모든 이들을 남성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으로 나누는 주민등록제도의 변화일 수도 있고,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로막는 교육 제도의 변화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문화적인 억압이 경제적, 사회적, 법적 억압으로 연결되는 상황에 주목하, 이와 같은 억압의 사슬 구조를 끊을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모두가 모두를 돌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자.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해온 가사와 돌봄은 재생산 노동이라 불리며 생산 노동이라 불리는 임금노동의 보조로 사고되었다. 이러한 구별 속에서 얼마나 생산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지에 따라 재생산 노동의 내부에도 위계가 발생했다. 결국 임금노동 중심적인 시각 속에서 성장과 생산력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라는 오래된 구절은 돌봄과 가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이들은 전 생애동안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모두가 돌봄의 수혜를 받으며 살아가기에 우리는 서로 타인에게 의존하며, 우리 모두는 사회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돌봄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자립과 의존이 서로 반대된다는 인식에 도전할 것이다. 자립한 시민과 자립하지 못한 불완전한 시민으로 구분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돌봄과 가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여가시간 또한 돌봄과 가사의 평등한 분배를 통해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모두가 모두를 함께 돌보는 사회는 가정만을 돌봄의 공간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돌봄 책임의 분담이 국가와 가정, 시장에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민주적이고 자발적으로 돌봄에 참여할 수 있고, 이러한 돌봄이 공적인 사회보장제도 체계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한다.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돌봄의 책임에 함께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모두가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시간과 사회보장제도, 돌봄 개념에 대한 재정립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등 임금노동 체계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임금노동이 축소되고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만이 가치 있다는 신화에 해체하고, 노동하지 않고도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이에게도 실질적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협상력을 늘리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실질적 평등의 가능성을 열어나갈 것이다.

 

가족은 이제 선택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남성여성의 결합만을 가족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불합리한 결혼 제도와 이성애 기혼 가족 중심으로 편성된 복지 체계는 바뀌어야 한다. 가족이 남성의 혈통과 계보로써 인식되고 규범과 제도로서 구성되는 현실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이혼과 결별 등 정상가족바깥의 삶을 꿈꾸고 이행하는 것이 낙인으로 작용하는 사회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우리는 이성애중심주의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원하는 사람과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이제 가족은 폭력과 억압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유로운 관계로서 구축될 것이다. 이때 가족 구성 여부는 누구에게나 온전히 선택 가능한 것으로 남아야 하기에, 가족을 구성하지 않아도 법적·사회적·문화적 억압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필수적이다.

 

개인의 의지대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와 동시에 억압적인 형태의 가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법적인 불리함, 경제적 이유 등의 사회적 고리는 개인이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이와 같이 폭력적인 남성-가장과 불행한 여성-어머니로 이루어진 가족이 유지되도록 하는 부당한 관행을 제거해야 한다.

 

동시에 모든 구성원들의 평등을 위해 가정 내 청소년과 어린이에 대한 권리 또한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은 한 명의 주체가 아닌,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가부장체제 속에서 아동청소년은 보호라는 명목의 통제와 폭력을 경험한다. 경제적/사회적 권리가 박탈된 상황에서, 가정 내의 폭력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가 박탈된 현실과도 이어진다.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가 박탈된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은 무성적 존재로 여겨지며, 이들의 성적 실천은 금기시된다. 그 결과, 아동청소년은 성적 실천에 있어 더 많은 위험과 성적 착취를 경험하게 된다. 아동청소년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비청소년의 성적 욕망으로 소비되는 모순적 현실에 처해있다.

 

아동청소년이 가족 구성원으로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미성숙하다고 여겨지거나 경제적인 토대가 없는 이들도 원치 않거나 폭력적인 가정을 거부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또한,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아동청소년이 성적 실천을 할 때에 폭력적인 환경에 놓이지 않을 수 있도록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립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불행한 가족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정치는 일상을 바꾸고 지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권은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서 발현된다. 인간의 권리는 시혜적으로 주어진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두가 필연적으로 함께 살기 위해 보장해온 것이다. 수많은 삶 속의 권리들이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어 거대한 인간다움을 이룬다. 따라서 정치는 일상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일상과 유리된 정책과 복지, 사회·문화적 관습들은 개인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졌다. 이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만들어 인간의 고립을 초래했고, 단적으로 여성의 일상을 고려하지 않은 여성 정책만으로 모든 개인의 삶을 대변하고자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와 일상은 유리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를 특수한 사람으로 전제하고 설계되는 후견적이며 예외적인 대안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제약 없는 혐오와 폭력에 노출된 개인, 인구 재생산을 위해 내 몸의 결정권을 빼앗긴 개인의 일상에서 출발하는 정치로서 우리는 인간의 해방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도 전반에서의 성평등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남성권력의 관점에서 국가와 가족,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를 바꿔내고자 한다. 이는 성관계에서 결혼과 가족 구성, 출산과 양육 등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경계를 넘나드는 페미니즘 정치를 시작하자.

페미니즘 정치를 위해 우리는 다층적인 억압에 주목한다. 빈곤과 장애, 성차별과 노동의 문제는 복합적으로 개인을 억압하고 있다. 하나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개인이 겪는 다층적인 억압에 대한 투쟁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결국 페미니즘 정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사회관계 속에서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기반과 평등한 경제적 분배를 모두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시하고, ‘보편이라 주장되는 윤리를 상대화해야 한다. 누가 겪는 차별이 더 심각한지, 혹은 누가 진짜 여성인지를 규정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차별에 위계를 두어 우리를 줄 세우고자 하는 기득권자의 시선 속에서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문제와 지금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나누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남성중심적인 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두가 다양한 형태로 겪고 있는 다층적인 억압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현존하는 다양한 민주주의적 요구와 함께 연대하며 나아가야 한다. 어떤 민주주의적 요구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 대신, 우리의 페미니즘 운동은 다양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동등하게 연결한다. 사회의 지배규범들을 허물어가는 우리들은 국가가 지정한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 국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 속에서 이주민-난민과 국민의 경계는 흐릿해질 것이다. 진정으로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가 우리가 나아갈 페미니즘 정치이다.

 

우리는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단일한 주체를 상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사회 변혁의 주체가 저절로 계급성을 지니게 되고, 그렇기에 해방의 주체가 오로지 노동자일 것이라는 믿음은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단일한 여성 집단이 사회 변화의 주축이라는 의견 또한 거부한다.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는 이미 구성되어 고정된 존재들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의 투쟁이 다른 투쟁으로 연결되고, 그로 인해 확산되는 운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모든 이의 삶에서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성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이별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사람들은 전진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이들과 함께할 것이다. 지금,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변화의 정치를 시작하자.


* 페미니즘 부속강령안은 당원들의 의견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정리되어 완성될 예정입니다.

*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가급적 다른 당원분들과 더 많은 토론을 위해 게시글 댓글로 작성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010-5572-0922 (신민주)로 의견 보내주셔도 괜찮습니다.

  • 양지혜 2019.06.14 11:16
    청소년 인권활동가로써, 당에서 청소년의 성적 권리와 경제권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의 여성주의 부속강령이 나와서 너무 반갑고 기쁘네요. 긴 시간 강령 작성하시느라, 많은 분들 의견 수렴 하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중심과 주변, 정치와 일상,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이분법의 체계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는 첫 문장이 너무도 좋습니다. 해방운동의 중심이 노동운동이라는 그동안의 관성을 깨고, 다양한 운동이 등가적으로 연쇄할 수 있는 정당정치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기본소득과 경제적 분배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참 좋습니다.
    강령 작성에 힘써주신 당원 분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민뎅 2019.06.16 00:24
    대구시당에서도 당원모임을 공지하여 6월 15일 페미니즘부속강령안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의견은 정리하여 공유드리겠습니다.
    일련의 준비 및 나눔의 과정에 수고하셨음을 말씀 드리고 싶고,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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