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보좌파정당은 ______정당이어야 한다"
저 빈칸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다만 '노동자 중심' 뿐만은 아니었다. 2008년, 다양한 사회운동/인권운동의 가치들이 어우러지는 '무지개 정당'을 기치로 내걸고 창당한 진보신당. 그후 5년, 여러 굴곡을 거쳐 다시 좌파정당 건설을 준비하고 있는 과정에서 꼭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진보신당이 표방했던 ‘무지개정당’의 다면화된 가치는 얼마만큼 실현되었는가. 왜 그러한 가치들을 담아야 하는가. 앞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지난 9월 7일 금요일 저녁, 진보신당 중앙당사에서 좌파정당추진위의 여섯 번째 연속토론회가 열렸다. “다시 무지개 정당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당원 뿐만 아니라 시민과 여러 외부단체 활동가들이 30명 가량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 지난 7일 저녁 진보신당 중앙당사에서 진행된 무지개정당 토론회 모습.
여성주의 정당,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나
"어떤 정당이 여성주의 정당이어냐 하느냔 질문, 창당할 때부터 줄곧 있어왔죠. 하지만 '이러이러한 정당이 여성주의 정당'이라는 답안은 제출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해야 해요. 진보정당에서 여성주의를 왜 얘기해야 하냐고.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긴 하느냐고."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서 활동하는 토리는, 왜 외국의 진보정당과 달리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면서 여성주의는 그렇지 못한지 물으며 말문을 열었다. 다만 낙태비범죄화나 동성결혼 합법화 등 특정사안에 대한 진보적 합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에 노동은 더 이상 남성-가장노동자로만 대표되지 않아요. 새로운 좌파정당 건설에 대해 나오는 뉴스들에 저도 관심 갖고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중심성'만으로 포섭할 수 없는 다양한 가치들, 다양한 정체성들을 엮어내는 새로운 이념, 새로운 프레임으로서의 여성주의를 고민하고 있나요?"
▲ 진보신당 장애인위원회 최완규 위원장장애인, “현재의 노동중심 비전, 너무 협소하다”
장애인위원회 또한 현재 진행되는 좌파정당추진 기획의 ‘노동중심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진보신당 장애인위원회 최완규 위원장은 노동중심성에 대한 논의가 너무 협소하다는 의견과 함께 발제를 시작했다.
“노동운동과 소수자 운동이 결합할 지점 또한 찾아야 합니다. 장애인 중 90% 이상이 중도장애인입니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을 뿐이지 장애인도 일을 할 수 있어요. 장애인도 유니온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민주노동당 때부터 계속 얘기해왔는데 지금도 진척이 안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노동조합 중심적인 논의가 갖는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당이 받아안고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요?”
고용이나 임금의 문제를 넘어서는 ‘장애인노동’이라는 의제에 대해 방청객과의 토론에서도 이야기가 이어졌다. 노동에 대한 댓가를 넘어 참여에 대한 댓가, 장애 이외의 잔존 능력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에 대해 긴 논의가 진행되었다.
아직도 소수자를 바라보는 당내의 관점이 미성숙하다는 점 또한 지적되었다. 당사 입주하는 과정에서도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적극적 노력이 미흡하거나, 장애인지교육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부족했던 점, 일상적인 언어에서 드러나는 장애인비하적 비속어의 폭력성 등이 다시 한 번 환기되었다.
청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변혁의 주체이기도
"청년 불안정 고용 문제, 주거권, 교육비 등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의제 삼아 당사자들과 만나고자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청년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그러하기에 운동을 펼치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알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발제는 청년 부문을 대표해 청년학생위원회 구승현 공동임시위원장이 맡았다. 그는 지금 청년세대가 운동에 관심갖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청년학생위원회 구성원들이 당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왜 당내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며, 이후 청학위의 활성화를 통해 청년세대를 대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발제를 마무리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자민 성정치위원도 ‘당사자운동’에 대해 말을 보탰다. “NL계열의 청년학생운동가들은 통일운동을 합니다. 좌파진영 청년학생운동가들은 노동운동을 하지요. 노동계 현장활동가들도 이들이 성장하여 노동운동을 이어갈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청년이 청년운동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요?”
노동해방 온다고 소수자 평등 같이 오지 않아
“이 토론회에 대해 ‘현장이 무너지고 있는데 아직도 무지개정당 운운하느냐’는 비난의 댓글이 있더군요. 현장운동이 무너진다고 소수자 운동을 안할 수 있나요? 사실 노동현장은 소수자에게 매우 폭력적인 공간입니다. 대공장이든 소규모 사업장이든, 노동조합이 잘되고 있든 아니든, 서열주의가 만연하고 여성은 차별당하며, 성소수자와 장애인에게 안전하지 않습니다.”
작년, 진보신당에서는 통합-독자 노선투쟁뿐만 아니라 반여성주의적 행태에 대해 많은 여성활동가들과 소수자활동가들이 당내 자정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탈당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성정책을 담당하던 여성활동가들은 SNS를 통해 스토킹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해결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박자민 위원은, 소수자 인지에 대해 당의 창당정신과 강령에 명시되어 있지만 이를 읽지 않고 그냥 입당한 사람들의 문제라면 당원교육을 통해 개선을 도모해야 겠으나, 이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당기위가 강력하게 작동해야 하고 소수자 인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활동할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 '다시 무지개 정당을 말한다'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 진보신당에서 성정치위원장으로 활동하였던 경험을 돌아보며 토리는 진보정당 공동체의 소위 ‘자정능력’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했다. 당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당기위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긴 하지만,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여성활동가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자정능력이 첫째이고, 그게 안될 경우 제도적 조치가 필요한 겁니다. 여성주의 인식이 부족해서 문제인 것도 아니고, 여성주의만의 과제인 것도 아니예요. 공동체의 과제이고, 민주주의의 문제인데, 도대체 진보정당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길래 이렇게 자정능력이 없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보신당, 강령에 인권이 있음에도 인권정당으로 가시화되지 못해
“인권적 요소가 들어있는 것과 ‘인권’이라는 개념으로 이것들이 묶이고 가시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인권’은 일종의 우산입니다. 하나하나 일일이 호명하고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소수자들을 아우르고 기존의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유효한 무기입니다.”
토론자로 나온 고은태 인권활동가는 진보신당의 가치가 인권으로 가시화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인권은 빨간 우산’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명시적으로 세우면 각 부문의 가치들이 모두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동자는 작업장에만 존재하지 않으며 가정과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좌파정당이 인권의 가치를 정치적/시민적 권리로만 한정짓지 말고 경제적/사회문화적 권리까지 포함해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왼쪽부터) 진보신당 최완규 장애인위원장, 박자민 성정치위원, 고은태 엠네스티 인권활동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곧 진보신당의 내적인 힘
진보신당 내부적으로도 큰 논란을 낳았던 임신중지(낙태) 비범죄화 논쟁에 대해서도 많은 참석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천주교 신자라고 밝힌 한 당원은 진보진영의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낙태에 대해 이견을 가진 당원들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정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 고은태 씨는 그가 활동하는 엠네스티에서 낙태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사례로 들었다.
“엠네스티에서는 여성의 재생산권(sexual reproduction right)을 존중한다는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유능한 활동가들이 떠났구요. 바티칸에서 엠네스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구요. 호주와 미국에는 유사단체가 만들어졌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재생산권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부서진 세상에 살고 있고, 어떤 조직이건 정당이건 부서진 세상의 일원입니다. 결국 다수결로 결정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서로를 설득해내는 역량, 그것은 진보신당이 가진 내적 힘일 것입니다.“
"'다름'을 존중할 자세가 되어 있으신가요?"
장애인 당원들은 비장애인 당원들이 스스럼없이 내뱉는 장애인비하적 비속어들의 폭력성을 말한다. 청소년 당원들은 '언제 봤다고' 곧장 말을 놓거나 '친구' '기특함'을 이야기하는 꼰대 마초 아저씨들의 폭력성을 이야기한다.
미디어에서 자본도 나서서 '차별철폐'를 말하는 예쁜 공익광고로 자기 이미지를 치장하는데, 진보를 말하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일상은 얼마나 '무지개빛깔'에 가까운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다만 활동가의 품성이나 도덕적 윤리 수준에서 소수자 정의를 말하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이념, 체제 변혁의 프레임으로서의 ‘무지개 정당’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토론자 뿐만 아니라 방청객들의 닫힌 입들이 하나 둘 열리고 목소리를 내었던 이날 토론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곱씹어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