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관 위로 진보신당 깃발이 덮였다. 유족의 뜻이었다. 5년동안 집회 현장을 들고 다니며 꼬질꼬질해진 깃발을 차마 덮을 수 없어, 발인 전날 밤 부랴부랴 주문한 새하얀 깃발. 추모객들의 헌화가 이어지면서 깃발은 금새 국화 더미에 묻혀버렸다.
밤새도록 빈소를 지킨 사람들이 충혈된 눈으로 하나 둘 들어섰고, 발 디딜 틈 없이 추모객들이 영결식장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다 모이니, 옛날 민주노동당이구나" 누군가는 그렇게 농을 던졌다. 30대 젊은 활동가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이 지긋한 추모객들에겐 그 풍경 위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부터 오늘날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 진보정치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 고인의 관 위로 진보신당 깃발이 덮였다. (사진: 진보신당)
"진보정치연합의 마지막 상근자였고, 민주노동당의 첫 상근자였습니다. 생의 마지막 직함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이었습니다. 병마와 싸우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한날 한시도 허투루 살지 않았습니다."
15일 오전 8시, 이재영 진보신당 전 정책위의장의 영결식이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시작되었다. 사회를 맡은 이용길 총장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상임 장례위원장들이 목울음을 삼키며 추도사를 읽고 추모객들이 흐느끼는 동안에도 담담했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한참 끊어졌다간 다시 이어졌다.
고인의 삶의 궤적을 되짚었고,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상영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표권한대행, 진보정의당 노회찬 의원, 장상환 전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등 세 명의 상임장례위원장들이 추도사를 바쳤다. 가수 정윤경씨가 ‘당부’와 생전 이재영 전 의장이 즐겨 불렀다는 ‘착한 사람들에게’를 부르는 가운데 추모객들이 고인의 영전에 헌화를 했다. 진보정치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던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지켰다.
▲ 영결식 사회를 맡은 이용길 진보신당 사무총장. (사진: 진보신당)
▲ 장상환 상임 장례위원장의 추도사. (사진: 진보신당)
"한국 진보정당의 설계자로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진보정당이 이재영 동지의 헌신이 바탕이 되어 궤도에 올랐지만, 오늘날 존재감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보정당의 독립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고 이를 위해 온몸과 결국 목숨까지 바친 이재영 동지에게 너무나 송구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민주노동당 당시 진보정치연구소를 맡으며 고인과 함께 일했던 장상환 교수는 고인이 진보정당의 성장에 핵심 역할을 했음을 상기시키며, 남은 사람들의 몫을 강조했다.
▲ 노회찬 상임 장례위원장의 추도사. (사진: 진보신당)
"그대의 한평생이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였네. 진보정당추진위, 진보정치연합에서 서른 명이 넘는 상근자가 단 한 명이 되었을 때, 그게 바로 자네였네. 2004년 10명의 의원이 당선되었을 때, 10여년 고생 끝에 평생 소원의 절반이 이뤄진 듯 했지만, 이후 분열의 과정을 겪으면서 진보정당은 쇠락했고... 지난 25년의 동반자로서 미안하고 부끄럽네."
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지난 운동사를 되새기면서, 고인이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 김종철 상임 장례위원장의 추도사. (사진: 진보신당)
"이번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두 후보들이 4대 중증질환을 국가가 책임질 것을 얘기하고, 1인당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를 말했습니다. 이 모두가 고인의 손을 거쳤던 의료복지 정책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정책들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떴습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표권한대행은, 힘없는 소수정당에 가장 오래된 상근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던 고인의 죽음에 우리의 책임을 물었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 정윤경 씨가 고인을 추모하며 이재영 전 의장이 생전에 즐겨불렀던 <착한 사람들에게>를 부르고 있다. (사진: 진보신당)
이상한모자의 추도사대로, "이제 다시, 산 자들의 시간이 왔다." 남은 사람들은 내남없이 못다 한 그의 꿈을 마저 다 이루겠다고 했다. '이재영이 되겠다'고도 했다. 아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뒤를 잇겠다고 다짐을 한 ‘선배’들은 오후에 광화문에서 다시 만났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이 먼저’라고 부르짖었고, 또 누군가는 경찰에게 얻어맞아 피멍이 든 노동자 후보와 함께 했다. "광야에 홀로 남겨진 신세"가 된 우리 세대들은, ‘선배’들의 추도사를 들으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외압과 내분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서 그 누구보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다. 뾰족한 펜으로 둥근 원을 그릴 줄 알았다(김수민)”
"독특한 음색과 톤으로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그는 타고난 '재사'였다(이상섭)"
"누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보관했고, 병상에서도 문병 온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스마트폰에 입력했다(홍원표)"
"그가 만든 인적 관계망은 한국 진보정당운동에 전무후무한 50명 정책연구원으로 현실화되었다(김정진)"
20대 말미에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한 내게 이재영은 ‘사람’이 아닌 ‘텍스트’다. 사귐의 행운을 누리지 못했고, 얼굴 한 번 지척에서 뵌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회고하는 고인의 모습을 모자이크처럼 짜맞추면서,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여겼던 나의 무서운 착각을 후회한다. 이어받을 ‘뜻’의 내용과 방향성을 다시 한 번 되짚어 활동가로서의 내 삶에 가리사니로 삼겠다. 그것이, 신참내기 활동가가 이재영을 보내는 이별의 방식이다.
안녕, 이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