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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하는 진정한 방식은 바로 청년 내부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당파적’ 입장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데 있다

청년에 대한 사회적 주목
  
청년들이 정치권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민주통합당은 ‘청년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슈퍼스타K’ 방식으로 공천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청년불안정노동에 대한 이슈화를 선도해 왔던 ‘청년유니온’의 한 활동가 역시 비례대표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었다. 또한 청년의 이익을 대변하는 온라인 독자정당(청년희망플랜)을 창설하겠다는 움직임이 일각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질세라 새누리당 역시 비대위 위원에 이준석이라는 청년을 영입한 바 있다. 청년의제를 선점하기 위한 각 정치세력의 경쟁이 본격 궤도에 오른 것이다.
  
청년이 이토록 정치권의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지난날 88만원 세대담론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년들이 가진 불만을 대변하는 각종 논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주목이 확산되었다. 물론 실제로 정치권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그러한 ‘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 지방선거 및 보궐선거를 통해 확인된 20-30대 젊은이들의 표심이 결정적으로 정치권을 견인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등록금 문제를 둘러싼 대학생들의 시위가 작년에 터져 나오면서 정치권이 갖게 된 위기의식도 무관하지 않다. 이쯤 되면 적어도 청년들 사이에서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막연한 의식 정도는 공유가 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성이다.
  
물론 이전에도 각 정당마다 청년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성 보수정치권에서 사고된 정책은 대개 ‘청년 일자리 창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성장 담론과 일자리복지론이 파탄에 이른 지금에도, 정치권이 청년에게 취하는 제스처는 여전히 시혜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시혜적 제스처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새누리당에서 주장한 청년실업수당과, 일각에서 주장했던 청년고용할당제와 같은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하에 논의하겠지만, 이러한 시혜적 발상들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두 번째, 그동안의 희망콘서트를 위시해서 멘토를 자처하는 기성 정치인들이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설파하는 방식이 있다. 이 역시도 ‘희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을 오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을 정치적 ‘대표’로 내세우는 방식이 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청년비례대표 공천과 이준석 위원의 비대위 영입, 그리고 청년논객들을 언론에서 ‘띄우는’ 것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 청년들에게도 가장 좋다!
  
우선 일부 ‘잘난’ 청년들을 정치권과 언론에서 ‘띄워주는’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청년의제를 사고하는 수준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물론 국회의원에 청년대표를 공천한다든지 하는 것 이면에는 그 동안 청년들이 정치권에서 ‘과소대표’되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일면 타당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점을 부당전제하고 있다. 첫 번째, 그것은 오직 청년들만이 청년의 목소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기성세대야말로 청년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두 번째, 일부 잘난 청년들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면 기성 정치사회와 청년들 사이의 간극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오직 청년들만이 청년의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대변할 수 있다는 과도한 ‘당사자주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니 오히려 이 냉정함이 요점인데, 청년들이야말로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오도된 방향으로 이끌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도한 당사자주의는 무엇보다 청년들이 의회나 각종 정치사회에 편입되면서 그 스스로가 다른 청년들로부터 인식의 괴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청년들이 기성 정치사회 내에서 ‘대표’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하자면 잘난 청년들을 정치권에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제 전체를 보다 올바른 보편적/사회적 차원에서 사고하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가 청년의제를 올바르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우선 청년 자신을 우리 사회의 일방적인 피해자나 희생자로, 다시 말해 우선적인 시혜적 원조를 제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단호하게 거리를 둬야 한다. 청년계층은 (그 범위를 어떻게 잡든 간에) 우리 사회에서 불안정노동, 차별대우를 강요당하는 계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불안정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사회가 보편적으로 책임져야 할 시민적 권리들로부터 배제된 수많은 계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눈을 감고 청년우선 정책, 청년에 대한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세우는 것은 청년문제가 맞닿아 있는 전사회적 모순에 눈을 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청년고용할당제의 취지는 이해할 만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이 분할되는 방식, 이를테면 한편에서는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며, 다른 한편에는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고용구조를 놓치고 있다. 이러한 전사회적인 고용구조와 관행 자체를 바꾸기 위해 청년들이 자신의 의제와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청년고용할당제는 자칫하면 또 다른 청년인턴, 청년알바, 또 다른 불안정노동과 또 다른 신자유주의적 착취를 장려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청년과 더불어 ‘모든 노동자’들이 더 적은 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소리 높여 단언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야말로 청년들에게 가장 좋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 청년들은 주거권, 노동권, 교육권, 경제적 자립 등 제반 사회적 권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소외현상은 물론 결혼 전까지 자식에 대한 지원을 부모가 책임진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은폐’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 청년들을 다시 수도권/지방, 유한계급/무산계급으로 분할하는 일부의 견해와는 달리 - 청년들의 문제는 분명 보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권리로부터의 배제는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령별로 보자면 이는 ‘청소년’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며, 동시에 고령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연령의 차원을 넘어서 사태에 접근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이주노동자, 여성, 장애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청년의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년문제가 사회적 권리영역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2등시민’들을 양산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적 구조의 한 단면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가장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야말로 청년들에게 가장 좋다”는 원칙을 되풀이해서 적용하자면, 청년들의 권리(노동권, 교육권, 주거권, 경제권, etc.)는 청년에 한정된 시혜적 정책보다는, ‘모두에게’ 보장되는 보편적인 권리를 청년들에게‘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년에 대한 환상을 넘어서 

아울러 우리는 청년 자신이 사회문제에 관해 정치적으로 의식화되었던 지금까지의 방식들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날 중간계급 청년들이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은, 기성세대가 누렸던 고도성장기의 과실들을, 이를테면 독점재벌기업이 누린 초과이윤의 과실의 혜택을 자신들만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불만, 무엇보다 자신이 성장의 과실을 누린 일부 부모세대와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지배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도성장기 때의 대학교육이 바로 이러한 경제적 ‘지대’와 ‘특권’에 접근하기 위한 주된 제도적 통로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항의도 대학교육이 더 이상 특권적 지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의 우회적 표출에 다름 아니다. (지난 반값등록금 시위가 반MB 선동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기억하라.)  이명박 정권이 호언장담한 ‘경제성장’과 ‘일자리 복지’로부터 그토록 처절하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도, 청년들의 의식은 여전히 모순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대다수 청년들은 비싼 등록금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 교육 전반의 공공성 강화에 대한 문제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등록금 시위에 나온 대학생 중 일부는 - 바로 자식뻘 되는 다른 청년들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 - 반강제적 잔업에 시달리는 부모뻘의 생산직 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믿고 있다. 다른 일부는 청소년,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침식하고 있다고 믿으며, 또 다른 이들은 여전히 ‘보편적 복지’보다는 ‘안철수식’의 ‘착한 자본주의’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기대하기도 한다. 청년들의 반MB 정서는 반노동, 반여성, 인종주의적, 반동적 정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최근 진보신당은 -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 좌파적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견 환영할만한 흐름이다. 만일 진보신당이 좌파정당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청년의제에 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특정계층을 겨냥한 시혜적 정책을 내세우기 이전에, 바로 그러한 계층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정치적 의식을 바꾸고, 그들의 정치적 프레임에 개입하는 보다 적극적인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개별적인 시혜적 정책을 내세우는 ‘평등주의적’ 접근은 결국 모순적인 입장으로 귀결되고 만다.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 자체의 틀을 바꾸지 않은 채 ‘평등주의’라는 미명 하에서 청년계층에 국한된 시혜적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면, 역으로 다른 계층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 전반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의식화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악순환은 불가피하며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는 억압받는 계층 각각의 입장을 의회주의적인 방식으로 ‘대변’하겠다는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계층을 실질적으로 조직화하고 의식화/주체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여기서 필요한 정치적 실천의 초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각각의 소외된 계층에게 시혜적 ‘혜택’을 주는 정책을 제안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각의 소외계층이 자신들이 겪는 모순을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견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의 지평을 제공하는 데에도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를테면 단순히 정책수립 과정에서 청년의 아이디어를 독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수많은 청년들(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청년 IT노동자, 청년 출판노동자, 청년 배달노동자, 기타 등등)을 조직하고 그들을 (자본주의 자체의 차별적인 속성과 오늘날 한국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경제적 재생산의 모순적 방식에 문제제기하는) 좌파적 대의로 견인하는 활동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환언하자면 단순히 당의 의사일정과 정책결정 과정에 청년을 참여하게 하는 것 외에도, 그 동안 정치적으로 미조직되어 있는 청년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진정으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보편적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사고하는 관점을 습득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청년과 기성세대
  
청년들은 여전히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미숙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청년문제를 보편적인 차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청년보다는 기성세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동시에 그들이 ‘성숙한 어른’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청년문제에 있어서 청년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자신도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청년문제에 대한 기성세대 자신의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동안 기성세대는 청년문제에 대해 ‘공감어린 멘토’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년 자신들에게 백번의 ‘공감’보다는 한 번의 ‘승리’가 훨씬 더 값지다. 오늘날 청년들은 이명박, 새누리당과 같은 ‘큰 주인’보다는 대학 교직원과 편의점/체인점 점주와 같은 ‘작은 주인’들과의 싸움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선거철마다 교체되는 민주주의 사회의 ‘큰 주인’들보다는 선거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항상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작은 주인’들에 대한 ‘승리’가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하다. 물론 그러한 승리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공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청년들을 ‘이해’한다, ‘공감’한다 같은 겸한의 제스처보다는 앞서 말한 ‘작은 주인’에 대한 승리를 견인하고,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확장하는 데에서 기성세대 자신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요청된다.

물론, 청년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보편적 권리를 누리고, 교육받을 권리, 일할 권리, 주거할 권리, 경제적으로 독립할 권리를 향유하는 것 이상의 의무는 없다. 이러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원래 청년들의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 기성세대 자신의 정치적 실패가 단지 청년들을 그러한 입장으로 내몰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CBS 라디오의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이준석(새누리당 비대위 위원), 조윤호(진보신당 당원 겸 좌파논객), 장혜영(연세대 자퇴 대자보의 게시자)을 섭외하여 청년이슈에 대해 토론한 방송을 청취한 바 있다. 각각의 청년들은 살아온 배경이 다르며 무엇보다 정치적 견해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자수성가한 엘리트주의 우파, 원리적 좌파, 온정적 자유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진행자가 그들에게서 어떤 ‘청년’으로서의 ‘공통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청년들의 공통성을 재확인하려는 것은 기존 사회(공동체)의 적대를 서둘러 봉합하려는 기성세대 자신의 바램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청년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했다면, 진행자는 이들 사이에서 대립되는 지점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냈어야 했다. 나는 해당 라디오 방송에서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기대해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청년문제에 대해 청년 자신들 내부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견해의 불일치(불화)를 기성세대가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청년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하는 진정한 방식은 바로 청년 내부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당파적’ 입장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데 있다. 앞서 청년문제는 그 문제를 이해하는 청년들 자신의 관점의 변화와 정치적 재조직화 없이는 적적하게 사고될 수 없다고 말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청년문제 역시 좌파들에게 있어 당파적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청년문제가 일부 청년 자신에 의해서도 오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청년은 오늘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존재이다. 그러한 분열적 양상에 대하여 기성세대가 자신의 당파적 입장 - 말할 것도 없이 좌파들에게 오직 당파적 입장만이 사회에 대한 보편적 관점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다 - 에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청년’이란 단지 계급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 내부의 ‘적대’를 서둘러 은폐하는 상징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계급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만큼, 청년 자신도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저 두 가지 사태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청년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공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박가분 ·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저자


[ 박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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