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 글은 진보신당 유럽당협 이라영 당원이 지난 6월 8일부터 10일까지 네덜란드 림부르흐에서 진행된 유럽당협 3차 총회 및 이와 함께 진행된 가톨릭대 조돈문 교수 간담회, 녹색당 당원과의 만남에 참석하고 쓴 에세이입니다. 


“당원들의 국가관이 애매한 관계로 국민의례는 생략하겠습니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분위기는 지난 6월 9일 토요일, 네덜란드 림부르흐Limbourg에서 있었던 진보신당 유럽당원협의회 총회를 시작할 때 모습이다. 황당한 ‘국가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 내 상황에 대한 조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해야 할 압력이 행해지는 상황이라니, 참담한 노릇이다. 오후 5시만 되면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로 회귀한 기분이다. 통합진보당은 점점 더 난관에 봉착했고 지난 4월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등록이 취소되면서 진보정당의 총체적 위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 어쨌든 유럽의 당원들이 하나 둘 모였다.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유로존은 휘청거리고 있으며 한국의 진보좌파정치운동도 새로운 전환점을 요구한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에서 모인 20여명의 당원을 비롯하여 몇몇 가족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유럽의 각지에 흩어져 살다 보니 공식적으로 당원들끼리 모두 모이는 기회가 일년에 한 번이다. 입당하지 않은 채 파리에 있는 당원들과 교류만 해오다 올 초에 입당한 나는 다른 나라에 있는 당원들을 드디어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운 자리였다. 독일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출신 노동운동가 최정규 당원의 집에서 만든 다양한 김치에 감동하고 냉동순대와 어묵탕을 놓고 향수를 달래는 풍경은 아마 한국의 당원모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구성원들 대부분 유학생과 주재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장기적인 활동계획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유럽에 장기 거주하는 당원이 다소 늘어나고,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되면서 현지 교민들과의 교류를 더욱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재외국민 투표시 지문날인이 강요되는 것에 대한 대응 또한 필요한 상황이다. 이 사안은 국내 거주자들이 문제를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외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총선의 경우, 투표장에 가서야 지문날인을 거친 후 투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에 사전에 어떤 행동을 하지 못했다. 다가올 대선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 문제제기를 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20120702162113_9139.jpg ▲ 지난 6월 8일부터 10일까지 네덜란드 림부르흐에서 유럽당협 3차 총회와 더불어 가톨릭대 조돈문 교수 간담회, 녹색당 당원과의 만남이 있었다.



조돈문 교수와의 만남: ‘쓸모있는’ 먹물 되려면?


그리고 총회와 더불어 마침 연구차 유럽에 잠시 머물고 있는 가톨릭대 사회학과 조돈문 교수를 초청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유럽에 있는 당원들 중 다수가 석박사 과정에 있거나 박사후 연구원이다 보니 학계와 진보정당간의 관계는 중요한 고민 중 하나다. 또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 세력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정당이 ‘엘리트 계급’으로 득실거리는 인상을 준다는 면에서 우리 내부의 정체성 갈등도 존재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먹물’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현상을 목도하며 어떻게 쓸모 있는 먹물이 될까를 고민하는 것은 진보 운동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세상에 먹물은 필요한데 혐오할 먹물이 아니라 활용할 먹물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가끔 ‘정치적 중립’이라는 모호한 언어로 정부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꺼려하는 학자나 예술가들을 본다. 중립이 되어야 할 사안이 물론 있겠지만 때로는 어정쩡한 중립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비판하지 않는 것이 중립이나 중도라는 언어로 포장되는 건 지양할 일이다. 

“연구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태도는 자본가의 착취와 별 다를 바 없다.”라며 조돈문 교수는 말문을 열었다. 노동문제에 주로 천착해 온 그는, 학계와 진보정당의 상호관계 구축을 고민하며 정책을 만드는 데 애쓰는 연구자들이 아직까지 부족함을 지적하며, 특히 참석자 중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 연구자들에게는 진보적 의식을 가진 과학자들의 참여가 진보운동에서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4대강 사업, 핵문제, 광우병, 천안함 사건 등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과학적 전문 지식을 요한다. 인문사회학자들의 연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있기에 과학자들과의 더욱 활발한 연대가 필요함을 제안하였다. 


권력은 Yes, 책임은 No? 파벌문제 해결해야 변화 가능


한편 현재 진보 정당의 중요한 문제로 파벌문제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어느 나라의 어느 정당이나 물론 파벌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정파가 ‘권력’ 행사는 하지만 정작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모순이 바로 문제다. 어떤 정파의 수장이 단지 ‘정파내’ 논리로만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지속 가능한 진보 정당의 구조라고 볼 수 없다. 기득권과 지배세력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이지만 정작 이들의 정파들 속으로 들어가면 지극히 비민주적이다. 우리 내부에 있는 패권주의와 위계를 인식 못하는 것이 큰 문제다. 그렇기에 진보정당이나 노조 안에서의 이런 파벌 문제가 앞으로 무엇보다 해결해야 할 과제다. 비민주적 집단이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이러한 조직 문화의 병폐를 해결하지 않고는 변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2004년 갤럽에서 2지망까지 확장하여 진보정당 지지율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2지망까지 합치면 그 당시만 해도 40% 정도가 진보정당에 지지의사를 보였다. 민노당이 처음 원내에 들어가던 2004년만 해도 대중이 진보정당에 대한 ‘잠재성’을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진보정당의 활동에 대중들은 그 ‘참신함’을 확인하지 못했고 그 실망이 이번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진보 정당에 대한 대중의 실망은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노동정책이나 복지정책은 있으나 지속 가능한 대안적 경제구조에 대한 전망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현재 진보좌파 정당의 문제가 아닌지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거대담론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정책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총체적으로 판을 어떻게 새로 짜야 할지 근본적 고민을 할 때다. 


녹색당 최형식 “녹색당, 진보정책 알리며 조타수 역할 할 것”


더불어 독일에 있는 최형식 녹색당 당원을 초청하여 앞으로 진보신당과 녹색당 간의 연대에 대해 토론을 했다. 최형식 당원은 녹색당이 농민들에게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방안과 GDP성장 기준에서 벗어나 행복지수를 도입하는 정책들을 구상중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정권을 잡는 것보다는 진보정책을 알리며 조타수 역할을 하는 것에 현재 더 집중해있다고 한다. 어느 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녹색당의 정책에 자극 받아 환경정책을 미룰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우선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왼쪽에 있는 정당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건강한 좌파가 존재할 때 우파도 자극 받아 왼쪽의 정책들을 조금씩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현재 우리의 정치 지형이 가진 위기는 오른쪽을 자극할 왼쪽의 총체적 부실이다. 당장의 정권교체가 중요함에도 이런 부실한 진보 진영으로는 ‘교체 이후’에 대한 답이 딱히 구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그저 정권교체만 외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두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서 그 분노 이후에는?”이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좌파 지지자들을 이 곳에서도 간혹 만난다. 우리는 모두 공통된 고민을 품고 있다. 분노와 반대, 비판보다 더 어려운 건 언제나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 이라영 (유럽당협 파리거주 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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