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성기업이 아니라 현대자동차를 생산한다. 우리는 동희오토가 아니라 기아차 모닝을 생산한다. 우리는 인터기업 · 영진실업이 아니라 현대중공업 · STX조선에서 배를 만든다. 우리는 제일휴먼이 아니라 연세대 건물을 청소한다. 우리는 용진실업이 아니라 홍익대에서 경비 업무를 담당한다. 우리는 CJ프레시웨이나 아워홈이 아니라 한일병원 환자들 식사를 책임진다. 우리는 (주)포스트원이 아니라 인천공항에서 전자택을 부착한다.
그런데 현대기아차 · 현대중공업 · STX조선 · 연세대 · 홍익대 · 한일병원 · 인천공항은 우리가 하청 · 용역업체 소속일 뿐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뺌한다. 노조를 결성하고 교섭을 요구해도, 원청은 교섭을 거부하고 하청은 자신들이 실권이 없다며 도망친다. 너무 억울해서 파업에 나서게 되면, 아무 관계가 없다던 원청이 직접 나서서 고소고발 · 손배가압류 등 탄압을 자행한다.
이처럼 노조탄압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 가지면서도 사용자로서 져야 할 책임은 모조리 면제되는 기막힌 제도가 바로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사내하청, 용역, 도급, 파견, 하청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일체를 결정하는 진짜 사장인 원청은 사용자 책임을 일체 지지 않는다.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화물트럭 · 덤프트럭 · 레미콘 · 굴삭기 기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보험모집인(설계사), 대리운전 · 택배 · 퀵서비스 기사, 간병사, 애니메이터 …… 우리의 이름은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우리의 이름이 처음부터 특수고용이었던 것이 아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본래 레미콘회사, 화물운송사, 학습지회사의 정규직 노동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화물 · 덤프 트럭, 레미콘 차량을 강제로 불하하고 사업자등록증을 만들어오라 하더니, 그때부터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며 특수고용직이 되었다. 학습지회사가 근로계약이 아니라 위탁계약 · 도급계약으로 계약형태를 강제로 바꾸라 하더니 그때부터 특수고용직이 된 것이다. 보험모집인, 애니메이터, 골프장 경기보조원들 모두 마찬가지다.
특수고용은 아예 노동자성을 강제로 빼앗아 버림으로써 노동자로서의 권리, 노조를 만들고 가입할 권리를 박탈해버린 경우이다. 이명박 정권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가입해 있다는 이유로, 건설노조와 운수노조의 설립변경신고를 받지 않거나 심지어 설립필증을 내주지 않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노동자임이 부정되니 일하다 병들거나 다쳐도 산업재해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 현대자동차의 사용자 책임을 촉구하는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투쟁
원청 사용자책임 인정, 특수고용 노동3권 보장이 글로벌 스탠다드
간접고용 · 특수고용의 문제는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에 해당한다. 전체 비정규직 중에서 직접고용 계약직(기간제 비정규직)을 제외하면 90% 이상이 모조리 간접고용 · 특수고용에 해당한다. 그 규모도 600~700만에 육박하며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기간제의 경우 사장이 직접 고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자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반면, 간접고용·특수고용의 경우에는 자본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투쟁이 벌어지는 사례의 90% 이상이 간접고용·특수고용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국제 노사정 협의체라 할 수 있는 ILO(국제노동기구)는 지난 10년 동안 무려 4차례에 걸쳐 간접고용의 원청 사용자책임, 특수고용의 노동3권을 인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특히 올해 3월에 나온 네 번째 ILO 권고는 한국 정부가 다른 핑계를 댈 수 없도록, 이례적으로 “현대자동차” “기륭전자” “화물노동자” “건설노조” 등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하며 권고한 바 있다.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다드’와 ‘국격’을 거론하는 이명박 정부, 하지만 ILO의 권고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ILO 부이사국이기도 한 한국 정부가 국제적 망신을 당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는 보장할 수 없다는 태도 아니겠는가.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갑(甲)’이 책임져라!
사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키는 방법은 매우 쉽다. 진짜 사장을 사장이라 부르고,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를 수 있도록, 노동조합법 제 2조의 문구만 고치면 되기 때문이다. 제 1항의 ‘근로자’ 개념을 확장하면 특수고용 노동 3권을 인정할 수 있고, 제 2항의 ‘사용자’ 개념을 확장하면 원청 사용자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런 단순명쾌한 해법을 적용하면, 수백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할 권리를 보장받고, 교섭을 통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홍길동처럼, 자신의 설움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누구에게 책임을 묻지도 못하게 설계된 것이 바로 간접고용·특수고용 비정규직 제도이다. 계약의 형태가 어떠하건 간에, 마땅히 ‘갑(甲)’에 해당하는 자본이 노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설립의 근본이었는데, 자본 스스로 이를 부정하는 꼴이 된 것이다.
▲ 노조법 2조 개정으로 '갑'이 책임지게 하자!
옳소!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홍길동이오!
화물연대와 건설노조를 필두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 3권 보장과 산재보험 동등적용을 핵심요구로 한 6월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무려 1,600일 넘게 파업농성을 벌이며 해고자 전원복직과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간접고용의 경우 한일병원, 인천남동구 도시관리공단, 인천공항 세관 등 원청을 상대로 직접 투쟁을 벌여 합의서를 체결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홍익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은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역시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에게 직접고용 책임을 묻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홍길동과도 같은 존재이다. 홍길동이 누구이던가? 서자 출신은 관리등용을 제한한다는 조선시대 악법 때문에 좌절과 울분 속에 지내다가, 억압받던 민중들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만들고 신분타파·만민평등을 위해 싸운 홍길동!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진짜 사장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하는 기막힌 세상! 특수고용 · 간접고용이란 비정규직 신분을 타파하고 평등세상을 위해 싸우는 우리가 바로 현대판 홍길동! 화물·건설 노동자들과 함께 죽음의 운전대를 내려놓고, ‘갑(甲)’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노조법 2조 개정 열차에 시동을 걸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