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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 몽상인가 망상인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시민에게 기본소득을 준다는 구상은 오늘날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좌파로부터 자유주의/보수주의 우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있다. 한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 태반이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내에서도 기본소득의 (제한적) 수용을 검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을 노동해방의 문제로서 자본주의 이후 대안사회의 필수적인 기본요소로 격상시키고, 케인즈주의/사민주의/복지국가의 역사적 파산 하에서 당면한 신자유주의와 장기불황을 극복할 유일한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와 장기불황을 넘어 미래사회로 가는 이행기의 경제전략인 셈이다. 그런가하면 기본소득론자들은 더불어민주당과 결합하여 자유주의 정부 하에서도 실행가능한 정책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도모하며, 적어도 장기불황과 고용불안정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안사회의 요소이든 이행기의 전략이든 아니면 현실의 경제정책이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토대를 가져야 하는데,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하에서도, 공산주의 하에서도 물질적 토대가 결여된 것이어서 실현될 수 없는 정책이며, 따라서 기본소득은 몽상이나 망상 속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책을 쫓아다니다가는 진보좌파 운동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은커녕 신자유주의와 장기불황도 극복하지 못하고 하다못해 현실정책에서 의미있는 성과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라서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필요한 대로 받아서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인데, 여기에 기본소득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원리상 기본소득은 자리잡기 어렵다.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에 기반한 사회고 임노동의 본질은 착취라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임노동은 고통과 소외를 의미한다. 만약 기본소득으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으면 노동을 안 할 것이므로, 이런 경우 재생산의 기반이 무너져서 소득도 창출되지 못하며, 그러면 기본소득을 줄 수 있는 기금도 없어져 버린다. 요컨대 기본소득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것이 실현될 물질적 토대는 무너지기 때문에, 설령 기본소득을 준다고 해도 그건 쥐꼬리만한 금액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기본소득으로 장기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장기불황은 대중들의 소득이 낮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율이 저하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이윤율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므로 이윤율의 장기저하가 현대불황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기본소득론자들이 불황의 해법으로서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는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득주도 성장정책으로도 장기불황은 극복할 수 없다. 대중들의 소득이 낮은 것은 기본적으로 장기불황의 결과이며(물론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정치력이 약화되어 임단협의 방어가 어렵게 된 것도 주요한 요인이다) 장기불황은 이윤율 저하의 결과이므로 장기불황의 극복은 이윤율 저하의 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자본가들은 이윤율의 저하를 신자유주의 반동의 정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진보좌파는 사회화를 통해 이윤율에 의존하지 않는 투자의 확대로써 경제의 성장과 고용의 증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화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는 것은 장기불황을 완화하는 게 아니라 자본의 이윤율 위기를 심화시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장기불황도 심화되어 기본소득을 줄 수 있는 기금도 더욱 빈약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진보좌파가 사회화를 도입한다면(오늘날 자칭 진보좌파라 하면서 사회화를 거부하는 논자들의 만연해있다), 그러면 장기불황을 극복할 길이 열리는 것이고, 성장과 고용의 회복 속에서 기본소득을 요구할 근거도 없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자동화와 인공지능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대안이라는 주장도 똑 같은 이유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자리 감소의 위기 속에서 실업자들에 대한 대책으로서 기본소득을 준다거나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 감소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준다거나 하는 주장도 장기불황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장기불황 하 경제성장과 GDP 증가가 둔화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을 위한 기본소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금융거래세와 자본차익세, 부동산 보유세, 환경세니 하면서 이들 자금으로부터 기본소득의 재원을 조성한다고 하지만, 이런 모든 조세와 투기이득의 토대는 실물부문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이윤이며,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축출될수록 잉여가치의 원천이 사라지게 되어 이윤율저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장기불황도 심화될 것인데, 기본소득의 재원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조성될 수 있겠는가?

 

기본소득론이 제기된 배경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장기불황 하의 대중들의 생존의 위기와 양극화가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자유화와 유연화, 그리고 사회보장의 삭감과 해체가 가져온 결과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고 사회보장을 확대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기본소득은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사회보장은 자본주의의 객관적 관계에서 발전하는 필연적 요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에 따라 재생산과 위기의 관리를 위한 국가의 전면적 경제개입을 불가피해졌고 노동력의 재생산의 조절도 국가가 떠맡게 되었다. 교육과 훈련, 실업보험, 의료보험, 연금 및 노후보장, 주택문제 등 사회보장 정책은 현대의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불가결한 체계라는 점에서 사회보장 정책은 자본주의의 객관적 관계의 발전에 그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지 말고 국가가 책임지고 고소득자, 대자산가, 재벌들 세금 높여서 무상 교육, 무상 의료, 국민연금 강화, 기초연금 인상, 주택 수당 등 사회보장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런 요구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는, 실현될 수 있는 합당한 요구인 반면, 기본소득 주장은 이런 현실적 기반이 없는 구름 위에서 뛰는 것 같은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사회보장 정책을 선별적인 복지라고 폄하라고 기본소득을 보편적 복지로 치켜세우며 사회보장 정책을 기본소득으로 보완하거나 심지어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곧 현실적인 토대를 갖고 있는 사회보장 정책을 무너뜨리고 노동력의 재생산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어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조절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적인 발생이 아닐 수 없다. 국가와 사회가 떠맡고 있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기금과 체계를 해체하고 그 기금을 모든 시민에게 기본소득으로 분배해서 개개인이 알아서 처분하라고 하면, 그 결과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게 되고, 기본소득의 무분별한 사용의 결과 개개인의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게 되는 경우 누구도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게 된다. 기본소득론의 보편적 복지는 말만 그럴듯한 얘기고 기본소득으로 보완한다는 주장도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한 사회의 사회보장 기금이 한정된 상태에서 사회보장을 기본소득으로 보완한다면, 불가피하게 필요불가결한 사회보장으로부터 무정부적인 기본소득으로 기금이 옮겨가게 되어 사회보장이 그만큼 훼손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을 삭감하지 않고 추가적인 재원을 조성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겠다는 주장도 마찬가지 이유로 수용할 것이 못된다. 기본의 사회보장기금 외에 추가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재원은 사회보장을 강화하는데 사용해야지 기본소득으로 지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보장 제도와 정책도 장기불황이라는 현실 하에서 물질적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장기불황 하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사회보장이 삭감되거나 해체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회보장 급여는 노동자계급의 간접임금이라는 점에서 임금인상 투쟁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 확대를 위한 투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보장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본소득론에 대한 전술적 비판에서 언급한 동일한 문제, 즉 사회보장의 해체가 장기불황의 원이 아니라 장기불황의 결과라는 것, 사회보장의 확대로 장기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장기불황의 원인은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라는 것, 장기불황을 극복해야 사회보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그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요컨대 현재의 장기불황 하에서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데는 엄격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보장의 획기적인 강화를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고 사회화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이윤율의 위기는 심화될 것이므로 알파고의 시대에 사회화의 요구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사적이윤의 지배를 받는 재벌기업과 대형은행을 사회화해서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하지 않게 되면, 이윤이 낮더라도 투자를 확대하고 경제성장과 일자리 확대를 도모할 수 있고, 사회보장의 기금도 비로소 안정적인 확충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장기불황의 시대에 사회보장의 확대만 추구하다보면 그 귀결은 재정위기와 국가채무위기, 즉 케인즈주의와 복지국가의 역사적 파산의 반복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론의 현실적 토대가 없다는 것은 구름잡는 이론적 논의의 수준으로부터 현실의 경제정책 수준으로 내려올수록 보다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현실의 정책으로 기본소득을 정말 실행하는 문제가 되면, 그 이론적 토론에서의 주장과 달리 기본소득의 도입이 사실상 불가하다는 것을 누구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조건에서 어느 누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재산/소득 불문하고 모든 시민에게 한 달에 1인당 50만원(5천만 인구를 상정하면 연 300조원)이든 아니든 하다못해 10만원(마찬가지로 연 60조원)이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정책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2018년 정부예산은 대략 429조원인데 말이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기본소득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운 성남시장 이재명도 경선후보 공약에서 감히 기본소득의 도입을 내걸지 못했다. 기본소득론자들과 결합해서 이재명은 생애 주기별 기본소득이란 걸 내세웠지만, 그건 기본소득이 아니라 실은 사회보장 정책이었다. 이런 정책 공약은 한국에서나 공약이지 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는 그것보다 더 포괄적으로 사회보장 정책의 일환으로 이미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다. 이재명의 기본소득은 유럽 복지국가들의 사회보장 정책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데, 한국의 기본소득론자들은 이것으로 선별적이고 시혜적인 사회보장 정책을 넘어가는 보편적 복지의 길을 열었다고 자평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자평한다면 모자라기 짝이 없는 짓일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이재명은 대선기간 중 사회보장 정책을 기본소득이라는 신상품으로 위장포장해서 뭔가 새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새 정치인인양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게 맞는 말이다.

 

김성구, 2019[진보평론]여름호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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