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당에 스탈린주의 정파가 있으면 안 되는가?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비록 사회당계를 우리가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사회당계의 조직원 개개인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1.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환원될 수 없다.
그간 사회당계 분들은 다수결의 결정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당계 지도부의 뜻이었겠지요. 이들이 다수결을 그리도 강조한 이유는 민주집중제 때문이었을 겁니다. 레닌의 의하면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다수결로 결정되기 전에는 어떤 반대 의견도 열심히 토론하겠다는 말이며, 결정된 이 후에는 소수파도 다수파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레닌 시대에 이것이 잘 지켜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다원주의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짜르의 통치에 맞서 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자본주의가 사회를 재편하던 시기였으므로 노동자계급 내의 정체성은 비교적 단일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민주집중제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사회당 지도부는 21세기 한국에서 시행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순진한 조직원들은 그 말을 믿었겠지요. 레닌주의는 레닌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민주집중제가 다원화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전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도부를 신성시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절대 다수의 조직원이 있는 조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사회당계 지도부가 대중 정당에서 이 민주집중제를 관철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레닌의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사회당 지도부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말입니다. 왜곡된 형태라는 것은 토론은 불가능하거나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면서 다수결을 강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당을 인정하되 대중조직을 정치조직화시켜야 한다는 노선을 가진 사회당계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노동당에서도 민주집중제가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당계 분들은 신기하게도 민주집중제라고 말하지 않고 다수결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론없는 다수결주의를 민주집중제라고 말하기엔 좀 미안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민주집중제의 생명은 조직원이 가능한 모두 토론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의견을 모으고 설득하는 작업이 없는 민주집중제는 그야말로 생명을 잃어버린 민주주의입니다. 다수파의 폭력과 다름없이 작동합니다. 이때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지도부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합니다. 소수파를 배제하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사회당계가 정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민주집중제는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소수파의 희생을 통해 다수파의 집권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토론을 통해 소수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민주집중제가 좌파의 정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그러나 민노당 시절의 다수파나 노동당의 다수파의 잘못된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대해 좀 더 논의를 진행시켜보겠습니다.
근대에 들어 부분적으로나마 정치적 자유를 얻어낸 사람들이 집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단에서 생산된 말(주장)이 (개인의 말보다는) 좀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정치라는 것의 본성이 다수의 의견이나 다수의 인격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즉 다수결이나 정파 같은 것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다수파가 반드시 맞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정치 이론가들은 다수결이 조직 구성원의 의견분포와 이해관심을 알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시장이데올로기 때문에라도 다수파는 더욱 틀릴 확률이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수결이 원칙이 되었을까요? 그것 외에는 대안이 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시됩니다. 여기서 소수파의 정치행위란 퇴장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방법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여하튼 다수결의 원칙은 부르주아 정치의 기본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좌파는 소수파를 더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수결에 의해 배제되고 부정된 소수파는 우리 사회에 서민과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르주아에 의해 장악되어 쪽수의 정치 외에는 알지 못하는 국회에서 좌파는 소수파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좌파들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자명한 사실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다수결이라는 형식적인 절차의 이면에 존재를 부정당하는 소수가 존재하며 이들 또한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민주주의입니다.
좌파에게 정치란 다수결이 아니라 다수결의 결정을 둘러싸고 진행됩니다. 그래서 좌파는 다수결을 절대시하는 부르주아 정치와 왜곡된 대표 체제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당 당권파의 다수결주의는 좌파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이 수호하고 있는 것은 미안한 말씀이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정당성입니다.
2. 승자독식문화와 권력에 대한 기회주의
권위주의 정권이 오래 해 먹은 국가의 법은 지배 권력을 위해 복무합니다. 이때 민주주의의 형식들은 도리어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다수결을 비롯한 의결절차들은 다수파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형식화되고 형해화 됩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민중 스스로 획득한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87년에 와서야 민주주의는 제도적 절차로써 나름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이 미완의 민주주의 투쟁은 오직 계속 싸울 때만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진보진영은 민주주의가 마치 완성된 것인 양 생각합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노동운동으로..” 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마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민주주의 투쟁과 노동운동을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던 진보진영은 민주주의 운동과 계급 운동을 대립킵니다. 즉 민주주의 투쟁은 자유주의를 위한 운동이며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생각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투쟁을 버리고 노동운동을 택했던 운동세력은 그야말로 정파들의 힘 싸움으로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패잔병처럼 보입니다. 현 조직운동의 위기는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겠지만 결국 정당성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이론적 무능과 스스로 방기해버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도적 절차가 형식화되어 다수파의 권력을 재생산하는데 이용되는 이런 상태를 우리는 보통 독재라고 표현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다수파는 더 이상 당파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됩니다. 국가는 당이 국가 그 자체가 되는거지요. 이것이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첫번째 이유가 바로 형식적 절차를 절대화했던 그 무지였을 겁니다. 이 무지는 자주파에 의해, 그리고 지금은 사회당계에 의해 반복되고 있는겁니다. 사회당계의 모습은 자주파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정당은 하나의 단일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질 수 없고 그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단일한 정치조직이 되는 순간 대중정당의 원래 기능은 사라지고 대중이 떠나간 왜소한 정치써클이 되는 겁니다. 예전 사회당이 그러했고 지금 노동당이 그리 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수결은 승자독식의 룰을 당연시 하도록 합니다. 승자독식의 룰이 암묵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비단 우리 사회의 일부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진보정당 내부는 물론이고 민주적 절차를 가지는 모든 조직에서 승자 독식의 룰이 암묵적으로 인정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승자독식의 룰 이외의 룰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이자 관념이며 통념이기 때문입니다. 승자독식의 세계는 이런 절대 다수의 권력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지향하게 됩니다. 이길 놈에게 표를 주자는 사표심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수결로 승자를 가르는 이 민주주의를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다수파가 국가이며 전체가 될 수 있는 이런 죽은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으며 파시즘을 향한 쭉 뻗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환원되지 않는다.”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다수파와 소수파의 의견을 비례대표하는 체제, 즉 한 사회에서 각각의 (정치)세력들이 맺는 관계, 갈등을 조절하고 비례대표를 이루는 과정과 그 정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각각의 정치 세력들은 자신만의 당형태를 만듭니다. 법적으로 용인된 정당이 만들어 집니다. 다시 말해 정당을 통해 각 세력들은 투쟁합니다. 법이 막지 않으면 전쟁날 만한 투쟁을 각 정당은 합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이러한 투쟁은 다양한 주장과 가치들을 놓고 경합합니다. 민주주의는 이 경합의 룰을 정하는 겁니다. 진보정당 내부에 민주주의가 없는 것은 이러한 룰을 만들지 않고 각자의 선의에 경합을 맡겨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의사결정과정은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본조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당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만이 권력을 독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단일한 정체성만이 정당을 지도합니다. 소수파의 의견은 묵살되고 오직 단일한 정체성과 지도-피지도만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스탈린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탈린주의는 본질적으로 권력에 대한 기회주의입니다.
3. 당의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민노당 이후 지금까지 현실운동으로써의 정당운동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분명 후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그 경험에 비해서도 지나치게 발전이 더디며 서구식 정당 시스템은커녕 당은 주변화되고 그나마 분열을 거듭하며 그때마다 인적 역량을 소모합니다. 통합정당은 우경화되거나 다시 분열을 준비합니다.
정치정당의 저발전은 한국운동 전반의 저발전, 민주주의의 후퇴,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의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정당운동의 구체적인 전망조차 없이 우리는 정당운동을 해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물어야 합니다.
저는 당 활동가들이 당내민주주의 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운동조직에서 전체가 내부민주주의를 거론하지 않습니다. 이는 내부민주주의, 특히 정당의 기본요건조차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는 지나치게 당연히 해왔던 관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자는 민주주의자로 태어나는 줄 아는 듯하며 자신이 민주주의에 익숙한 것처럼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만이며 사회주의자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당내민주주의는 정밀하게 설계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고 그것에 의해 훈련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당내 민주주의는 우리 운동현실의 암담함과 후진적인 정치현실, 특히 정파주의에 찌든 현실 때문에 내부민주주의를 기껏 정파들 간의 갈등조절 제도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정파주의를 조절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적어도 패권주의가 당에서 범람하고 그것이 정당정치의 기본 원칙을, 특히 아래로부터의 의사결정의 원칙과 같은 문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왔기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의 원래 취지와 의미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당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사회내부에 내재해 있는 계층 간의 갈등과 분열의 요소를 정당적으로 조정, 완화, 통합하고 여러 계층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연구하며, 그것을 정당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반영함으로써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여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집단”입니다. 이것은 정당의 기능을 중심으로 개념화한 것이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정당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친다면 정당이라는 현장은 부르주아 사회의 부르주아적 기구로 묘사되며 정당이 계급투쟁의 현장이며, 그것이 무엇보다 대표하는 계급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락시킵니다.
서구, 예컨대 독일의 사민당의 경우 약 1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100년 정당을 훌쩍 뛰어넘는 이 같은 시간동안 독일의 계급정치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존속하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그 이유를 당내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강령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당원중심주의의 원칙은 당의 기본원칙으로 기본강령에 기입되어 있습니다. 즉 기본강령은 당내민주주의를 의무화한 강령입니다.
정당은 내부에 당원들에 의해 조직된 2차 집단, 즉 정파와 의견그룹들, 그리고 개인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의 집합입니다. 정당은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에 토론이 제도화되어야 하고 각 세력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합의의 과정, 즉 “민주적 합의”가 제도화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서 집합의 의지가 만들어 집니다. 이것이 당의 정체성입니다. 당의 정체성은 특출한 정치 엘리트나 당권파의 이론가에 의해 결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당내 민주주의입니다. 다시 말해 당의 정체성은 당의 내부민주주의, 즉 내부의 민주적 절차에 의해 토론으로 조직되어 생산됩니다.
독일 사민당의 경우 강령의 개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여 몇 년에 걸쳐 조사하고 강령초안을 위해 분과위원회 등을 만들고 세부계획을 토론하며 합의에 도달하는 기간이 몇 년씩 걸리기도 했습니다. 기본강령을 수정하는 86년 기본개정안이 나올 때까지는 8년이 걸렸습니다. 이 8년 동안 당원중심의 토론(이게 제도화되어 있다.)과 정당적 합의의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당내 민주주의는 150년 동안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당내 제도의 총화입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암묵적으로 수용되는 “토론 문화”는 이 제도의 합의 과정에 만들어 지는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내민주주의는 고려되어 본적도 없으며 낡은 권위주의 조직의 정체성이 그대로 정당에 투여되는 승자독식체계입니다. 20년전 정당운동을 처음 결의 했을 때의 패기조차도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제도화의 열망의 관성과 반정치주의가 남아 있을 뿐이군요. 그래서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이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4. 사회당계 동지들께 바랍니다.
노동당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을 공유해야 합니다. 사회당계의 지도부의 스탈린주의적 경향은 결국 권력의 기회주의입니다. 이 기회주의는 타자를 착취하는 기회주의입니다. 조직원을 착취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결정을 독점하되 자신은 모든 책임에서 회피해왔던 그런 기회주의입니다. 이것은 정당운동의 경합적 다원주의와 정면을 배치하며 본질적으로 반정치적, 반정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결국 대중정당의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구태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 파산한 이론으로 정당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요구합니다. 사회당계 지도부는 언더조직을 해산하고 당원 동지들께 진심으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탈당한 수천 명의 동지들에게 사과하고 반여성주의적인 행위도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상처입고도 사회당계 내부의 모습을 전해준 용기 있는 동지들께 직접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당계 동지들께서는 이제 연고주의를 떠나 당원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십시오. 같이 공부모임을 만들고, 같이 토론하며 노동당을 백년정당으로 함께 만드는 대업에 같이 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