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잔이라 불리운 사내

by 로자 ☆ posted Jul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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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할멈 고생해서 발품 팔아 간직하고 있다가

내 카페에 간직하다가 다시 길러 온겁니다.

잘 읽어주세요.^^

 

 

 

 

1980년 12월24일 형장의 이슬로 살아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씨의 사진이 공개됐다.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운 사내를 기억 하십니까?

1976년 무등산 자락 밑에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막노동과 철공소일 등을 하며

22살의 유망한 젊은 청년이 철거반원을 4명이나 살해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공부를 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를 철거원들을 생매장 하기위한 구덩이로 묘사하고,

살인을 즐기는 희대의 살인마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사법사험 1차 합격자인 그가 공권력이나 다름없던 철거반원을 살해한 사건이었노라고 경악하고

그 행적의 엽기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인면수심'이니 잔혹성이니 하며 저들 마음대로

재단을 했습니다.


  세칭 무등산 타잔 혹은 무등산 이소룡으로 불렸던 인물. ..박흥숙

빈민의 영웅으로 서민들은 감히 정부에 항거하지 못하던 시절에 공권력이란 미명아래 들이대는 권력에

최소한의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당시서민들은 대놓고 역성을 들지 못했으나

마음속에서는 무었인가 동조하는 느낌이 들게 했던 인물로.... 뛰어난 머리로 사법 고시 1차까지

독학으로 통과했으나 연좌제로 실격 빈민촌 철거 깡패들과 맞서 싸우다 투옥, 새조차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00교도소에서 누명을 벗기 위해 탈옥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

광주 운림동 무등산 중턱의 무허가 빈민촌, [속칭 무당촌]

 그는 평소 무등산을 닮고 싶다고 했답니다.

 사람들은 무등산이 그를 닮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권력, 언론과 배부른자들의 입에서 '난도질' 당할때

빈민들과 소외된자들의 가슴속에 그는 신화속 '영웅'의 모습 이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산업화 정책으로 무너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이농민들이 도시 전역에

무단정착한 곳. [무조건 상경]

1960년대만 해도 이농민수가 거의 400만명으로 그 숫자가 모두 서울로 집중되었으니 당시 도시

곳곳의 무허가 정착지의 규모를 가늠 할 수 있을 것 .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무조건 도시도 끌어들인

박정희정권은 일만 부려먹으면 됐지 잠자리까지 봐줄 수 없다면서 급기야 서울시내 빈민촌 판자집을

도시정비라는 명목으로 강제 철거하기에 이른다.

박정희정권이 도시환경을 정비하고 서울로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킨다는 명목으로

'광주대단지'(철거민이주단지) 개발사업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픈 우리 도시 빈민의 투쟁이 시작 됩니다.

 

.박흥숙은 머리가 좋았고,

 매일 20시간식 공부했다고한다.

 몸이 약해져서 했던 운동도 대단한 무술이란 듯이 왜곡 보도한것도 그렇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서명구명운동을 벌이며 박흥숙을 보호하려하였다.

박흥숙이 언론에 보도

된 것처럼 살인을 즐기는 살인마라면 이런 서명구명운동이 일어났을까?

박흥숙은 경제개발이 한참이던 그 시대적배경의 피해자이다. 경제부흥과 빈곤퇴치정책은 공업화에 중

심이 맞춰지고 덕분에 농촌은 몰락하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온 사람들은 청계천 판자촌 등 많은 이농

민들이 판자촌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너무 배가고픈 나머지 자신의 아기를 삶아먹는 사람을 보았다던

당시의 시민단체원의 말은 아주 섬뜩하였다.

 

대책 없이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철거를 일삼던 1970년대...

무등산타잔  역시 그런이유로 피해를 당했던 피해자이다.

박흥숙이 살던 무등산일대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그곳에 설치될 예정인 케이블카의

가시거리에 있는 미관을 해치는 것의 철거를 명령했고,

포함된 20여 가구가 철거대상이 되었다.

모두 철거되고 박흥숙의 집을포함한 4가구만 남아있었고,

 

 철거원들은 박흥숙이 흩어져있던

가족을 모아 함께살기위해서라는 일념하나로 60여일동안 만든 움집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 집이 물타고 박흥숙의 어머니가 모아 놓았던 30만원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박흥숙은 꼭지가 돌아 이같은 비극적 사건은 발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가난과 시대적 배경이 낳은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이사건이 사람즐의 뇌리에에서 각인된 이유는 ..........?

70년대 폭압의 독재정권시대에   홍길동같은 상징성 때문에.....?
 


상계동 올림픽에 관해서부터 쓰겠다. 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각 언론들은 역사적인 일인듯 떠들어댔고 그 영향으로 국민들도 들떠있었다.

그러나 그 외곽에는 그로 인한 소외된 우리 이웃이 있었다. 올림픽에 오는 외국손님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도시미학적 관점에서 진행된 달동네 재개발사업 때문에

상계동 주민들을 비롯한 서울 200여 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몇 십년씩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주민들은 최소한의 삶의 공간을 보장하라고 외쳤지만 정부는 철거깡패와

포크레인, 그리고 전투경찰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그들을 구속하고 집을 철거해 버렸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고 했지만, 언론마저 침묵해버렸던 독재의 시대였다.

카메라는 철거민과 함께 3년을 생활하며 그들의 투쟁, 그들의 아픔과 희망을 기록했다.

때로는 카메라를 직접 철거민의 손에 쥐게 하여 당사자인 자기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독립영화권 작품영역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다큐멘터리로서는

처음으로 야마가타 영화제에 초정될 만큼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다음으로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다. 1977년 4월 20일, 오후 3시경, 무등산 중턱 덕산골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러 갔던,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7명 중 4명이 살해되었다.

자신의 집이 철거되고 불에 태워지자 격분한 박흥숙(당시 21세)이 철거반원들을 포박한 후 쇠망치로

머리를 가격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무등산 덕산골을 '무당촌'으로 부르며 이곳이 마치

사이비종교의 소굴이자 범죄의 온상인 양 보도하기 시작했다.

 

언론은 그가 이소룡을 좋아해 무술을 즐겨 연마했으며,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산을 뛰어다녔다는

증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에게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기사는 주로 사건의 엽기성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사건의 발생, 범인, 범행 수법 등에 대한 기사는 사실보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사건의 엽기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번듯한 집에서는

도저히 살 기회가 없었던, 중학교 진학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던 '도시 빈민 박흥숙'의 모습은

가려졌다. 그는 1980년 12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재판 과정에서 그가 살아온 이력과 철거된 집이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기 위해 60일 동안 혼자서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는 것이다. 엽기적인 살인마에서 그는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검정고시를

치르면서 미래를 꿈꾸었던 긍정적인 청년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의 진실은 살인마 박흥숙도 아니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 박흥숙도 아니다.

그 모두와, 당시 커다란 사회 문제였던 도시 빈민의 문제를 함께 놓고서 생각할 때만 진실이 드러난다.

성실한 청년이 왜 살인마가 되었는가... 그 배경에는 바로 도시 빈민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로자  돌아 댕기며 짜집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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