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된다.
조반유리는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회자되는 말 중에서 하나이었다.
이는 모든 정치적 반항 또는 저항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 문화대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말이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중국공산당 내 좌.우의 살벌한 권력투쟁으로 많은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실권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마저 잃었다.
당시 적극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세력을 지칭하여 조반유리라는 말을 줄인 '조반'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대표적 무리가 홍위병들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10여년의 세월동안 조반들로 인하여 무소불위, 불법천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때 등소평도 문혁세력인 임표, 강청 등에 의하여 6년동안 가택연금과 유배지에서 노동생활을 하게 된다.
등소평의 장남은 대학교에서 조반세력의 시달림을 참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였다.
장남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나 하반신이 불구가 되는 불운을 겪게 되며,
다른 자식들도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게 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문혁의 대표격인 임표는 모택동에 반기를 들다가 실패한 이후에 비행기를 타고서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추락함으로써 즉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당내의 권력양상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에 등소평의 재기도 가능하였다. 물론 임표가 죽을 때까지 등소평이 죽지않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모택동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찌기 등소평이 30세의 젊은 시절에 국.공합작에 대한 중국공산당 좌.우의 대립에서 모택동을 지지하다가 실권을 당하였다. 등소평은 국.공합작을 반대하였던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이 아니라 과거 모택동노선을 지지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적으로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을거라 생각되며, 모택동은 말년에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좀 다르긴 하였지만 끝까지 등소평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등소평 또한 모택동을 신뢰하며, 끝까지 그를 져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