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7월 16일
⑨사랑은 성적 착취를 위한 시물라시옹이다.
성이야기9) 순결을 강요하는 여성주의는 여성의 적
ㅇ
가치교환으로의 섹스와 소비로서의 섹스
가치교환인 섹스의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돈을 주고받고서 하는 매매춘부터, 승진과 직업유지를 위해 상사에서 바치는 섹스, 지위상승을 위해 부잣집 아들이나 권력 있는 자들과 관게하는 신레렐라 컴플렉스적 섹스에 이르기까지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는 다양하게 현실에 존재합니다. 이런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에는 사랑이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에 올바른 성관계가 아니라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법의 처벌을 받는 매매춘이나 강제적인 매매춘과 같은 가치교환으로의 섹스 아닌 다른 관계의 경우에는 용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랑과 순결이 중요하고 그런 도덕성을 지켜나가야 하기 때문에 매매춘을 형법으로 처리하는 것이라면 모든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를 형법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 순리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모든 가치교환으로의 섹스를 형법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전 주택이 교도소화되어야 할 만큼 우려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을 너머 우리의 의식에는 일반적인 섹스를 가치교환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가 사회를 약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부의 분배를 그나마 촉진시키는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이라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는 생산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생산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졌고, 섹스 역시 소비적인 것보다는 생산적인 것이었습니다. 쾌락으로서의 섹스는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부를 가진 자들의 부의 분배를 받는, 섹스를 제공하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섹스는 생산적이었던 것입니다. 매매춘은 그 생산적인 면이 돈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라는 측면 외에는 다른 가치교환의 섹스와 다른 점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치교환의 섹스와 대립되는 섹스가 있다면 그것은 순결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섹스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순결과 사랑으로서의 섹스이기 이전에 소비로서의 섹스가 존재합니다. 순결과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소비로서의 섹스의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경우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 정도로 소비로서의 섹스는 생산성이 없는 섹스를 의미합니다.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혼외 섹스와 혼전 섹스 중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가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소비로서의 섹스일 것입니다. 부부간의 섹스는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일 때도 있을 것이며 소비로서의 섹스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치교환으로서의 섹스라는 측면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의 섹스에 있어서 가치 교환적 요소가 있느냐고 의문을 내세울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아내가 남편과의 섹스를 거절한다는 것은 남편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자신의 주장을 남편에게 강요하는 가치교환으로서의 요소로 섹스를 이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려 부부간의 섹스에 있어서는 소비로서의 섹스가 더 없는 편입니다. 부부 서로가 색정광이 아닐 경우에는 소비로서의 섹스에 그다지 탐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에 이루어질 사회적 생산 행위를 위하여 소비로서의 섹스를 절제하는 편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로서의 섹스는 섹스 그 자체의 쾌락에만 탐닉하는 섹스에 해당할 것이며 생산으로서의 가치를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섹스를 의미합니다. 지금 흔하다 흔한 여관과 모텔과 호텔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으로 젊은 남녀의 혼전 섹스와 결혼한 남녀의 혼외 섹스에 있어서 가치교환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그것은 소비로서의 섹스에 해당할 것입니다.
사랑의 정점인가 소비로서의 섹스인가?
소비로서의 섹스의 전형적인 형태는 사랑의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섹스일 것이며 이것은 사람의 나눔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나눔이 아닌 혼외 섹스나 혼전 섹스는 유희로서의 섹스에 해당할 것이라고 보이는데 이 유희로서의 섹스는 사랑이라는 매개어를 가지고 자신의 유희로서의 섹스를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이 정당화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거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혼전의 남녀나 혼외의 남녀의 섹스에 있어서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고 자기 기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섹스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그 정당화만이 자신의 섹스행위를 윤리적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섹스 행위가 사랑이란 느낌의 정점에서 그 나눔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나눔으로는 진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그들은 가지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섹스를 나누게 되는데 그것은 섹스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주어진 순간에서의 유희에 해당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전섹스나 혼외섹스가 사랑이란 기만의 이름으로 포장을 하는 이유는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순결이라는 도덕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결이라는 도덕율에 의하여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이라는 순결적 용어로 포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니까요.
순결이라는 도덕적 개념이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힘이 없게 되어버린 현대사회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용어는 유희로의 섹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 호기심을 행동으로 변환시키는데 있어 대단한 촉매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를 확인하게 만드는 과정으로서 섹스의 필요성까지 정당화시켜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섹스를 하지않고 어떻게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섹스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한다는 명제까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명제는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현실적 명제이기도 합니다.
섹스를 통해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과 섹스를 통해 대상이 삶을 살아가도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가 때문에 혼전 섹스를 한다는 남녀가 있다면 그들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섹스를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섹스는 도덕적 죄의식을 주게되는 도덕적 일탈이라는 기분을 가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사랑을 만들려고 하거나 섹스를 통해 상대의 본성을 알 수 있게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사랑에 이르지 못하고나 혹은 상대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하더라도 상대와의 섹스는 남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들에게 섹스는 상대가 같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가 아님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에 미래에 치루어야 할 삶의 고통을 예방해주었다는 측면에서 유익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만들기 위한 섹스나 상대를 알기 위한 섹스도 결국한 서로의 삶의 고통을 예방시켜주는 정보를 알기 위한 가치교환으로서의 바람직한 섹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랑의 정점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나눔으로서의 섹스는 사실 상 존재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사랑의 정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정점이 결혼입니까? 아니면 그 정정 아래도 내려가 버리는 헤어짐 이전까지입니까? 그 어느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정점으로서의 섹스는 사랑의 끝이라는 결론이 나게 되는 것이므로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존재는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용어이다.
신화나 고전을 볼 때에도 순결한 사랑을 노래한 것은 거의 없다는 데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설 아래서 사랑의 존재에 대한 존경과 사모는 근세 부로죠아 시대 이후에 나타납니다.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부터 드러나게 되는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랑은 죽음 이상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익스피어가 이런 사랑을 그린 것에 대해서는 본원적으로 다시 고찰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으로부터 성적 가치의 착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섹스의 실제적 가치를 비실제적 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시물라시옹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성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물라시옹인 사랑을 실제하는 것으로 부여잡기 위하여 생산하는 성을 소비하는 성으로 치환시키면서 그것을 자유와 자신의 선택으로 착각합니다. 이런 착각은 여성주의를 부르짖는 여성주의자들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치교환적인 섹스를 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가 가치교환적 행위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그들이 좋아서 사랑이라는 매개어를 내세워 사랑의 행위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므로써 그들은 그들의 가치있는 성적 기능을 하나의 소비의 대상으로서 소비당하는 것이며 남근중심적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적 착취의 시스템에 일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존재하고 사랑을 찾아야 하기에 섹스를 나눈다는 현대의 자유정신에 의거한 여성의 사랑을 찾는 행위는 소비로서의 섹스만을 부추키며,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의 섹스마저도 대가의 지불없이 착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성의 힘은 어디 있을까요? 여성에게도 지성이 있고 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남성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여성의 실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유희와 쾌락의 본원인 섹스의 시작이며 섹스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의 성기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아기가 태어날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여성 자신을 살게 하고 키우고 자라나게 만드는 자신을 위한 성스러운 자리입니다. 그 성스러운 값을 사랑이라는 말에 정신이 나가 공짜로 남자에게 주는 바보같은 짓을 여성들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여성주의의 시작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