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의 어머니와 심하게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차에 문제가 있어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버스로 출퇴근 할 때였다. 나에게 차가 없다고 학교로의 야간 출장 업무를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교육구 한국어 통역사 3명 가운데, 한 명은 출장 업부를 거의 안나가고 또 한 명은 자신의 아들 학교 행사에 참석해야만 한 까닭에 학교의 주요한 행사인 오픈 하우스 행사에 통역 출장나가야 할 통역사는 나 혼자 뿐이었다.
학교 오픈 하우스 행사 출장 업무를 마치고, 버스를 이용해 집에 도착한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늦은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30 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저소득층 민중들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리고 버스를 갈아 타고 하느라 자그만치 3시간이나 걸려서 집에 도착하였다.
직장에 가기 위해, 오전 6시 반 집을 출발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나에게 던진 어머니의 한 마디가 나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밥 먹었니?” 어머니로써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질문에 별안간 화가 났던 이유는 아마 내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였고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의 논쟁은 확대되어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 문제로 진전되었다. 어머니의 주장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나 살기 위해 먹는 것이나, 그게 그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요즈음 당게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한미 FTA 체결의 궁극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는 것이지 노무현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는 민주노동당 NL들의 생각은 아마 우리 어머니의 주장과 같을 것이라 짐작된다.
어찌되었던 어머니의 이러한 주장,
즉 “먹기 위해 산다는 주장”은 먹는 것이 최종 목적인 까닭에 먹기 위해선 그 어떠한 부정이나 잘못을 저질러도 먹을 것을 쟁취할 수만 있다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문명화 된 인간으로써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별하는 도덕적인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위 “국익”이라는 미명으로, 소수의 잔인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선 대다수의 농민과 소외된 민중의 삶이 피폐화된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같은 어머니의 주장에 대해 나의 “살기 위해 먹는다” 주장은,
“산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인 것이다. ‘야수와 같은 무자비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문명화 된 인간으로써 모두가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삶을 누릴 것인가?’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삶을 누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인 것이며 먹는다는 것은 생명체로서 삶을 유지하려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1920년대, 알라스카 에스키모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루의 일과는 먹을 것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이들로부터의 만족한 미소는 오로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따뜻한 고기 한 점을 베어 물 때서야 비로써 나타난다.
그렇다면 2000년대 한반도 남쪽은 1920년대 알라스카와 같은 야만의 세계란 말인가? 고기 한 점을 찾아서 하루 온 종일 벌판을 뒤져야 하는 시대이냐는 질문이다.
...
이하의 글은 내용이 무거운 관계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마저 보고 싶으신 분들은 "쟁점과 토론"방에 있습니다.
김 우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