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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에 실린 서평입니다. 책이 많이 팔리면 공역자 중 한 사람인 저에게도 약간 도움이 됩니다. 도와주세요~~
좌파, 진보하지 말고 전환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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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후 정의』…"강추, 우리 시대 생태사회주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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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경제적 형태를 갖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를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한 인간을 다른 이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사회 전체, 국가 또는 공존하는 모든 사회를 다 합치더라도 이 지구의 소유자일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지구의 점유자이고, 지구에게서 이익을 얻는 이들이며, 뒤를 이을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상태로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한 이야기일까? 누구라도 이 문장을 보면, 20세기 말 이후에 등장한 환경보호론자나 생태위기론자의 말이겠거니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칼 맑스가 『자본』 3권에 남긴 문구다.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내게 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문장들을 소개해준 것은 『기후 정의』(이매진)라는 신간 서적이다. 이 책은 이안 앵거스라는 캐나다 사회주의자의 편저서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낸 것이다.
‘기후 정의’라... 사실 이미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 있는 소수 독자층을 제외하면 그렇게 매력 있게 다가올 제목은 아니다. MBC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의 내용을 좀 더 현학적인 필치로 다룬 책이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부제는 좀 더 자극적이다.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
책 첫 머리를 장식한 위의 맑스의 인용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저자 명단 안에 피델 카스트로나 에보 모랄레스(현 볼리비아 대통령)가 올라가 있는 것도 그렇다. 실제 책 내용도 제목보다는 부제가 던져주는 인상에 더 가깝다. 이 책은, 한 마디로, 기후 변화 문제를 실마리로 한 우리 시대 생태 사회주의의 교과서다. 내가 이 책을 꼭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생태 사회주의의 교과서
이 책은 ‘선집’이다. 무려 45편의 글들을 모아놓았다. 그 중에는 불과 1장짜리 짧은 연설문도 있고, 좀 긴 논문 성격의 글도 있다. 저자들의 출신지도 다양하다. 우리가 번역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북미나 유럽 쪽 필자들이 있는가 하면, 낯선 남반구(남미, 남아공 등) 필자들의 글도 상당수 실려 있다. 영어 제목 “The Global Fight for Climate Justice”의 ‘Global’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개인 저자가 아닌 단체 명의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 저항’이니 ‘사회주의 동맹’이니 하는 낯선 외국 좌파 단체의 이름도 볼 수 있고, ‘비아 캄페시나’(국제 농민운동 단체)나 ‘기후변화 원주민 지구회의’ 같은 국제 조직들도 마주하게 된다.
대개 이런 종류의 선집은 자료집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곤 한다. 다채로워서 좋기는 한데 책 전체를 꿰뚫는 문제의식이나 선명한 결론이 아쉬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단체 명의의 성명서 비슷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다면, 꽤 지루한 독서가 될 위험도 높다. 그런 성명문이라는 게 대체로 판에 박힌 정치적 입장의 확인이나 상투적 주장의 나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후 정의』를 처음 마주하며 우려한 것도 이런 위험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우려는 말끔히 씻겼다. 때로 지루한 글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저마다 특색 있는 글들이 마치 한 저자의 책처럼 체계적으로 배열돼 있었다.
처음에는 기후 변화의 심각성과 원인을 밝히는 글들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는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 등 자본주의적 해결책의 오류와 한계를 따지는 글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책 뒷부분으로 가면, 한 편 한 편 읽어갈수록 ‘반자본주의적’ 대안의 골격이 점점 더 분명히 눈에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은 기후 변화 문제에 전혀 문외한인 독자라도 전혀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다. 일단 과감히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해, 그것이 인간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또한 낯설게만 느껴지던 ‘생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이 점점 생생하게 다가오게 된다.
편저자 이안 앵거스는 참으로 요령 있는 편집자인 것 같다. 아마도 생태 사회주의자로서의 그의 오랜 이력도 이런 솜씨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 노동당의 캐나다판인 신민주당(NDP)에서 당 내 좌파로 활동했던 불굴의 사회주의자이고, 오랫동안 온라인 저널 <기후와 자본주의(Climate and Capitalism)>를 내면서 기후 정의 운동의 최전선에 서온 인물이다.
그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저자들을 보면, 이 책의 정치적 지향이 어떠한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카스트로, 모랄레스 등 남반구 좌파들이 있는가 하면,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USFI)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급진좌파정당인 민주사회주의당(DSP)도 있다.
서문을 쓴 데릭 월은 최근 원내 진출에 성공한 영국 녹색당 안에서 생태 사회주의 블록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녹색 정치의 선구자인 독일 녹색당이 정치적 실용주의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녹색 운동의 급진성의 새로운 담지자로 부상하는 흐름들이 주로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 특성들로 인해 『기후 정의』는 단순히 기후 변화 문제만을 다루는 전문 서적이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 전반의 교양 입문서로 읽힌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말로 나온 책 중에서 생태 사회주의의 최신 흐름들을 살피는 데 가장 좋은 개설서가 아닌가 싶다. 가령, 이 책에 실린 테리 타운센드의 글(‘자본주의의 반생태적 러닝머신’) 한 편만으로도 초심자가 생태 사회주의의 핵심 내용을 접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탄소 자본주의를 넘어 ‘태양 코뮌주의’를 향해
한국 사회에서 기후 문제 대안이라고 하면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다. 국내 환경운동 일각에서도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고, 이명박 정부 안에도 그런 흐름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에게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는 대안이기는커녕 질병의 한 양상일 뿐이다. 이것은 생태 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적 접근이 생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만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패트릭 본드(남아공)의 말을 들어보자.
“다국적 기업들은 실제로 공기와 대기 중 오염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권리를 원하며, 그 계약을 법적인 용어로 성문화해서 가격을 책정하고 이미 배출한 오염물질에 대한 배출권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유럽 탄소시장 시스템은 그들에게 배출권과 나아가 계속 오염할 권리를 할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돈이 된다. 그들은 그 배출권을 팔 수 있다. 그래서 ‘오염자 부담 원칙’이 아니라 ‘오염자 수익 원칙’이 되는 것이다.” (291쪽)
대기의 이산화탄소량 증대로 인한 기후 변화 가속화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인데, 자본주의는 다시 이 생태 격변을 자본주의 이윤 추구의 지속과 시장 확대의 소재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후 변화 양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가 이것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들을 시도하는 것을 봉쇄하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이중의 맥락에서 생태 위기의 주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이 책에 글을 실은 불평꾼들만의 시각이 아니다. 미국 카터 정부와 클린턴 정부에서 일했고 현재는 예일대학교 산림환경학부 학장으로 있는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는 누가 봐도 ‘극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연구와 엄청난 고민 끝에 (도달한) 내 결론은 대부분의 환경 황폐화가 현재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의 결과라는 것이다.”(350쪽에서 재인용)
그럼 해법은 무엇인가? 『기후 정의』의 논자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해가 뜨는 곳이다. 이들은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1만7000배에 해당하는 태양 에너지가 매일 지구에 도달”(187쪽)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태양 에너지의 기술적 잠재력이 “현재의 지구 전체 에너지 소비의 7~10배”(399쪽)에 달한다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 태양 에너지 체제로 전환한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획기적이고 즉각적인 감축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다소 긴 분량의 글(‘기후 위기 - 21세기 사회주의는 생태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에서 다니엘 타누로(벨기에)는 이러한 지향에 ‘태양 코뮌주의(solar communism)’라는 이름을 붙인다. 좀 난데없는 조어(造語)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태양’과 ‘코뮌주의(공산주의)’만큼 서로 잘 어울리는 말들도 달리 없다. ‘태양’이라는, 지구 위 만물의 원천 앞에서 우리는 ‘코뮌’(공동체)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 코뮌주의’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다. 『기후 정의』도 지적하는 것처럼, 덴마크 등은 이미 20% 이상의 에너지를 태양광과 풍력으로 충당하고 있다(363쪽). 문제는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있지 않다. 전환의 비용이 진짜 쟁점이다. 현 체제가 기피하는 것은 바로 이 비용의 지불이다.
이 책이 지목하는 부담 주체는 이제껏 탄소 자본주의를 통해 생태 위기를 누적시키면서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들이다. 일국적인 수준에서도 그렇고(자본 소유 계급),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도 그렇다(북반구). 그래서 지구적 차원의 대안으로 주창하는 것이 ‘생태 부채’ 개념이다.
이미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지구정상회의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해외 부채가 아닌 생태 부채를 지불”(22쪽)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북반구 국가들이 자원 수탈, 환경 파괴, 온실 가스 등 폐기물 투기로 남반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으며, 그것이 금전적으로 보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콰도르의 한 기관은 이 액수를 연간 최소 1조6000억 달러로 추산했다. 이것은 최빈국 부채 총액의 세 배에 달하는 수치다(185쪽).
『기후 정의』의 저자들은, 이렇게, 태양 사회로의 전환과 부의 거대한 재분배(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 세력 관계의 역전)를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여 바라본다.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의 변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변화의 전제이며, 역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변화 역시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의 변화의 전제다. 이것이 곧 생태 사회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며 동료 인간들에게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다.
사회주의 역시 바뀌어야 한다
한데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있다. 단순히 기존의 ‘사회주의’에 ‘생태주의’를 덧붙이면 ‘생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와 생태주의가 서로 융합하려면 둘 모두 크게 변화해야 한다. 생태 사회주의는 곧 ‘사회(주의)화된’ 생태주의이며 ‘생태(주의)화된’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크게 바뀌어야 하는가? 자본주의 생산력에 대한 역사유물론의 근본 관점이 변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생산력을 새로운 사회의 계승 대상으로 바라보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연장선 위에서 사고했던 전통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여러 글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핵심 주제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어떤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의 저력이 되기보다는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이런 방식의 생산력 발전의 단순한 계승자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그것을 막고 중단시키며 되돌려야만 한다.
앙드레 고르가 그의 대표작 『프롤레타리아 안녕』(이현웅 역, 생각의나무, 2011)에서 제기한 바 있는 이 문제를 다니엘 타누로는 이렇게 제시한다. 혁명이 지연되면서 “비자본주의적 사회의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하기 시작했다”(433쪽)고. 그에 따르면, 기후 위기는 이러한 부패의 가장 생생하고 포괄적인 예증이다.
대전환이 계속 지연된다면, 어쩌면 진보의 가능성은 고사하고 인류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지 모른다. 이안 앵거스는 맑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 수수께끼처럼 끼워 넣은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는 문구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의 암시라고 해석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시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선택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선택지에서 사회주의는 야만, 즉 문명의 붕괴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착잡한 전망을 가장 선명하게 제시한 인물은 발터 벤야민(20세기 초의 ‘야만’, 즉 나치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좌파 사상가)이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아주 다른 것 같다. 필시 혁명은 기차 타기가 아니라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인류가 아닐까.”(354쪽에서 재인용)
이런 맥락에서 이제 좌파에게 더 어울리는 표어는 ‘진보’가 아니라 ‘전환’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고 돌아 서는 것이다. 이렇게 ‘멈춰 서고 돌아 서는 것’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과거의 사회주의와 너무도 다른 얼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태양 에너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분권화된 경제, 사회 체제를 요구한다. 이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태양 사회로의 전환을 선뜻 내켜 하지 않는 근본 이유다. 권력 집중과 자본 독점 없는 자본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집중 및 독점과 호응하는 태양 에너지 체제도 생각하기 힘들다.
이러한 사정은 기존의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모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바뀐’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태양 에너지와 조응할 수 없다. 그것은 ‘다원화되고 분권화된’ 사회주의여야만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단순히 이어받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문명적 차원에서 그것과 단절하는 사회주의다.
『기후 정의』에서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 반성의 토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쿠바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에서 시행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 모델을 복제했는데, 사회주의를 생산력 발전의 양적 결과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순전히 양적인 경쟁을 벌였고, 자본주의 발전 모델이 전체 인류를 인식 못하는 소비사회의 구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발전을 달성하려 했다. 이 행성은 존속할 수 없을지 모른다.
모든 가정이 승용차를 한 대씩 가진 모델, 북미식 목가적 모델, 할리우드 등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하며, 미국 2억 5000만 주민의 실상일 수도 없고, 세계 다른 곳에 있는 엄청난 배후의 빈곤층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도 없다. 환경과 양립 가능하고 더 집합적으로 기능하는 다른 발전 모델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쿠바 의회의 경제사업위원회 의장 오스왈도 마르티네즈의 대담, 353쪽에서 재인용)
70억 인류 모두가 미국 중산층처럼 살 수는 없다. 더구나 그 미국 중산층도 지금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꿈꾸고 실현해야 할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도 좋고 지구에게도 좋은,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좋을 그런 삶은?
『기후 정의』가 기후 문제를 기회 삼아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물음을 접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평소 기후 문제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필독의 가치를 지닌다.
2012년 02월 01일 (수) 12: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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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십니다!!!
좋은 책 소개 잘 봤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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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뜻은 부천당협 운영위부터 책을 읽고 토론하겠다는...??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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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바구니에 쏙...구입은 열흘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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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용산당협 공부모임 교재로도 추천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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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궁금 한데요.이념도 좋은데.
제가 좀 이해 안가는것이 있거던요.
어떤 이념을 실천 할려면.이런 시대에는 그러한 기술이 동반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는것 같네요.
제가 전기기술자이고, 발송배전이나 신재생에너지
기타 에너지와 전자 전기관련 20년 공부하고 경력 있는데요.
좀 이런 이야기는 환경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열에 관계된 것이고,
그러한 열은 지역 특성에 따라서 오스트롬의 철학처럼,
그 지역마다 철학과 가치가 틀린것으로 알고 있거던요.
pbbc나 igcc경향
원자력의 pwr이나bwr같은 어던 열역학적인 기술이나 재생에너지라는것도
열의 효율성에 관계된 것이고,
환경 문제도.. 여기서 말하는 이념 문제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지만, 이산화물과 황산화물이 대기오염의 60%이상을
차지하고 폐암과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을 지금 현재 통제하는것이
기력발전소의 싸이클링 같은 기초적인 열에 관계된 시스템 문제가 기인해야 하거던요,
그런데,
그런거 없이 이런 어떠한 관념적인 성격으로 말하면.
어떠한 사리와 이치가 사람들에게 전달될일도 만무하고 현실성 자체도 떨어지고 설득도 안되고
실현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데,
제가 잘못된 생각 일까요. 다들 전문용어나 상투적 용어가 난무 한데.
이게 생태적인 방향이 맞는 건가요.
좌파 상업질로 생각하지 않으나. 최소한의 기력발전소에 의한 환경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도 없고,,지금 현실로 겪고 있는 대안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잘못 판단하는거
같고.
이와같이 말한다면,kist같은 대전지역은 다들 우라늄 지하수물 먹고 있는데
다 암걸려서 죽는거고.. 지금 우리집 원자재는 폐기물이라 다들 독소에 걸려 죽는다라는 식인데,
좀 그렇지 않을까요.
어떠한 기술상적인 현상을 말하고 그거에 대한 대안과 현실성을 말하며
생태를 말하는것이 설득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을까요.
우리시대에 황당한 미사여구만 난무한거 같아,
글하나 남기고 갑니다.
정치보다는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으며
20세기에는 세탁기가 21세기에는 롯봇 청소기가 인간을 좀더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 합니다.
생태는 기술에 근거하지 않거나 기술과 열역학에 관한 기본이 없이
이념이나 사상으로 도배질 한다면,아프리카의 원시 촌락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주장하는바와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기술없는 생태주의는 뜬구름 잡는 소리이고.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없는 선진사례와 대안은
뭘까요.
생태주의 한다면,,, 기초적인 지금의 한국 사회의 열환경과 기초적인 기술과 흐름부터
전반적으로 제시하고 효율적이고 대안적인 기술을 말하며 생태정치를
논한다면.큰 설득력을 얻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너무 상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이념적인데,
그것을 바처줄 기술과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궁금하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 책으로 끝날것 같아,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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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오스트롬 책좀 한번 읽고,,다시..그리고 태양 코뮌주의??? 북유럽은 바람이 많이 불어 제끼죠..
뭐..디테일 하게,,까면,,저 같은 사람에게,,의도가 있다,이렇게 판단할것 같아,,글을 줄이지만,
환경은 기술혁명을 동반하고 제시하지 않는 생태주의는 그거,,
기만이라는 것은 나도알고 당신들도 아는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거시는 기술의 방향이죠.
기술의 성과이기도 하구요. 무슨말인지는 다즐 알거라 생각하고요..
탄소배출 시장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과 자금력이 이쪽으로 많이 장기적으로
많이 몰릴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고 오욕된 이념질에 의해서
잘못된 방향제시로 인해서 수많은 기회비용이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요.
그런 면에서
당신들의 지금의 방향성과 행동은 대단이 모순적이며
대단이 비 생산적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어개가 무거운 분들일수도 있겠지만,
이 자금이 들어가는것이 결국 국민들 세금이니,,한마디 남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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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적인 플렛폼이 없는것 같아.
찾아 보실것을 권합니다.
분산형 재생에너지,
수요반응,
스마트 그리드 기술을 기반하다는것도 지금 앞으로 15년은 걸리것이구요.
분산형 재생 에너지 쪽에서 이 글 대로라면.
분산형 에너지 기술인데..이게 scada시스템으로 지금 통제되는 한국 환경에서
어떠한 혁신을 말한다고 한다면수요반응에 의한 즉각적 연동 시스템을 더 구현 할려면.
전체적인 scada를 모두 통제로 바꾸던가. 예비 동력 시스템 자체나 지역 특성화 에너지 전체에 대한 수요 요구와 특성을 모두 파악해야 합니다...
말이 안되는 현상이 되거던요
에너지 저장 기술을 위한 스마트그리드 플랫폼 이라는것도 대규모 케피시턴스에 의한 입출력 정전파에
의한 기술이 완비 되어야 가능한데,,제주도에 시험중인데
지금 그 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깐..지금의 기후정의라는 세계적인 이슈는 정의는 정의인데.,
한 30년 우리의 어떠한 열 환경은 퇴보되고 나서 새롭게 매트릭스 재조립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scada시스템 환경에서 새롭게 솔루션은 제조립 되고..낭비 요인은 점차 줄이고 있지만.
늘어나는 열환경과 열손실 환경 속에서.
전체 사회적인 새로운 에너지 대안을
어더한 이념식이나 정치운동으로 기존처럼..진행한다는 것은
솔직하게 망상에 가깝게 보입니다.
한마디로..현재의 우리나라나 기존 말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가진
화석 에너지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해없는 생태주의 이념주의
에너지 정의는 실현 자체가 불가능하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수 없는 하나의 코난 만화를
사람들이 그리고 그래 저게 정의일수 있어 말할수 있지만..
연구하고 제조립하고 과제를 수행하는 우리 공학도나 기술자들 입장에서는
솔직하게 아무 현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연구 공부 논문 기술현상의 변화에 대해서
둔감할수박에 없는 지금의 생태주의를 신뢰할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igcc-pfbc-조력 등으로 계발되고 변화되는 열시스템과 원자력으로 양분되 가는 현상에서
이러한 지금의 한반도 우리가 살고있는 열을 어떻게 쓰고 낭비하고 오용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와 기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동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현장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좀 황당하기 이를데 없으며
혁신을 용어만 말하는데..진짜 혁신이 무언지도 모르는데 혁신을 말하는것은
좀 아이러니 같습니다.
기술동향과 전체적인 성향과 지금의 환경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그러한 상황판단 속에서 진짜 정치적인 환경에대한 혁신적인 마인드를
촉구 합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기술적인 기초적인 말을 한것이고
당신들이 주장하는 저런 기후정의를 위한 기술적인 말을 한 것인데,
알아나 들는 기초적인 용어들일지.. 누구는 입으로 떠들면,,다 되는줄 아는것 같아,
안습함....




읽어볼 만한 책인 듯..김현우 동지가 부탁을 하니 왠지 안어울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