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애 이야기

by 왼쪽날개 posted Sep 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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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통 당게에 글쓴지 오래되어 뭘 좀 써볼까하다가...
게을러서 새로 글은 못쓰고 "출석" 차원에서 예전 블로그에 쓴 글 하나 올려봅니다. -_-;

요즘 당게가 좀 거슥하여 정신적 시각적 안정을 위해 당게를 떠나는 분들이 많으신듯...
저는 좀 개인사정이긴 했는데.
어쨌든 도시에서 농촌으로 귀향하듯
매사 역주행이 취미인 저로써는 남들 떠날 때 돌아와 개기는게 취향에 맞을듯합니다.
건전당게~ 지향하며 제 블로그 글 하나 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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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란 일종의 불편함이다. 그것도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서만 발생하는 불편함.
색맹이 장애인으로 구분되나? 장애등급에 포함되지 않는것으로 알고있다.
사회적 인식 역시도 크게 대수롭지 않은 "차이"로 인정한다.
기본적인 신호등 체계가 색맹인 분들이 그것을 판단하는데 "장애"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여지껏 몰랐다.
신호등 색 구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전혀 고려하지않은 신호등 체계가, 이러한 사회적 배려의 부족이 이분들이 거리에서 일종의 "장애"를 느끼도록 만든다.
차이가 장애가 되는건 분명 사회적인 것이다.

샛 길님은 사회로부터 주어진, 배려하지 않는 환경에 의해 맞닥뜨린 어려움을 극복해 다른이들과 불편없이 운전하기위해 다른 방식의 운전법, 신호등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거리의 교통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개발해야했다. "장애없이" 거리에서 다른이들과 함께 지내기위한 극복의 방식이 순전히 개인에게 부과되어야한다는 것은 뭔가 부당하다.

"다름"을 통해 "다르게 느끼는 것, 다르게 판단하는 것,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차이"이다. 그것은 장점이 될 수 있다. 색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통해 가을 단풍을 색이 아닌 무채색의 풍경에서 다른 미적 느낌을 받는다는 샛길님의 단풍풍경에 대한 미감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남들이 갖지못한 느낌과 감각을 지니는 장점임이 분명하다.

내 경우는 "장애"로 따지면 장애등급에도 들어가는,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
오른쪽 청력이 제로다.
왼쪽귀만으로 소리를 듣고 살아간다.
색맹인 샛길님이 칫솔에 밴드를 묶어놓는다거나, 거리에서 신호등과 차량등 색구별의 어려움을 방어운전의 생활화를 통해 아무런 불편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왼쪽" 만으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나의 방식이 있다.

간혹 사람들은 신기하다는듯, 불편한게 없냐고,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 어떤사람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고 생각해봐. 뒤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겠지. 무언가 보고 판단하는데 더 장점이 있겠지. 하지만 너 뒤통수에 눈이 없어서 불편하니? 뒤통수에 눈이 없는 니가 이상하니? 나도 똑같애. 뒤에 눈이 있으면 더 편할수도 있겠다고 니가 생각하듯이, 나역시 오른쪽 귀가 들리면 더 편할 수 도 있겠다고 생각해."

우리는 하늘을 날수없어 불편하다.
물속 깊이 숨안쉬고 들어가 자유롭게 하루종일 헤엄칠 수 없어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불편한 것으로 느끼거나, 장애라고 생각지않는다.
나의 오른쪽 귀가 장애로 느껴지는건 오직 사회에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일 뿐이다.

나는 사람과 걸을 때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법을 알고있다.
교실에 자리잡을 때 오른쪽 구석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테이블에 회의를 위해 여러사람과 자리할 때 남들보다 먼저 우측 구석에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포착하고 잽싸게 자리를 잡는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 때, 함께 시간을 보내야할 때 서로 불편하지 않기위해 나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에서 나는 "장애"를 느낀다.
논의의 평등을 상징하는 "원탁 테이블"은 내게 결코 "평등"한 테이블이 아니다.
4각의 모서리진 테이블에서 두 모서리 끝이 나를 위한 최상의 포지션이지만 원탁 테이블에서 날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난  왼쪽귀가 테이블 정면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앉아야만한다.
4각 테이블이 그래서 나에겐 "평등"한 테이블이다.
다만 내게 가장 편안한 "구석"을 "말석" 취급하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불편할 뿐이다.

내가 운전할 때 옆자리에서 크게 말해주지 않는 사람은 불편하다. 그들도 내가 불편하겠지만 나도 그들이 불편하다.

이미 나의 조건을 이야기했는데 배려해주지 않는 이들은 불편하다.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할 때
난 우선 우측을 선점한다. 함께 걷다가 자리가 뒤바뀌면 난 주로 코너를 돌을 때 자연스럽게, 좁은 길이나 작은 언덕에서 살짝 뒤로 쳐져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온다. 나에게 왼쪽으로만 듣는건 익숙하지만, 상대에게 왼쪽으로만 듣는 사람이 익숙치 않음을 나는 알고있다. 내가 스스로 우측으로 이동하는건, 그걸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는건 나와같은 다름에 익숙치못한 그들을 위한 나의 배려다. 하지만 이때 자신의 우측을 허락하지 않는, 내가 그(녀)를 배려하는 것을 어렵게하는 이들이 간혹있다.
그때 내 조건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다.
상대가 나의 배려를 배려로 느끼지 못하고 불편해함으로 서로 함께 배려해야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으며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난 생활에 베어있는 나의 노하우를 모두 동원하고있고, 양해까지 구했는데 내게 우측을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 사람, 내가 왼쪽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불편하다.

나에게 우측은, 누군가 나의 우측에 있는 사람은 내게 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난 그가 내게 무엇을 말할지 항상 불편하고... 우측은 내게 불안감을 준다.
못믿겠지만... 좌파라는건 내게 신념이상의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무엇이다.

어 렸을 때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신부의 좌측에서 입장해서, 신부의 우측으로 나오는 모습이 심히 좌절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다음에 결혼을하면 식 내내 신부가 내게 속삭이는 소릴 알아들을 수 없을거라는게 속상하고 좌절스러웠다. 다행히 주레 아줌마나 영감님이 떠드는 동안 신랑신부는 서로 말이없다. 하지만 나올 때 함께 행진하며 물어야겠지?
그순간 혹시 나에게 사랑한다거나 행복하다거나... 이런 결정적 대화를 놓쳐서 의도치않게 상처를 줄수도 있는일이니까.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 ㅡ.ㅡ"
결혼식.... 불편하다. 젠장. ㅡ,.ㅡ;;;

이딴게 꼭 지켜야하는 무엇이 아니라면
난 신부의 오른쪽으로 입장해 오른쪽으로 함께 나올것이다.
그것이 서로 함께 살아가는 첫순간의 첫걸음이기 때문에.
난 그녀의 어떤 이야기도 놓치지 않으려하는 것이고, 그녀가 이런 날 배려해 나의 왼편에 선다는 것은 분명 정당하다.

사람들이 모두 알고있고 파악하는 것중 내가 결코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소리에 방향이 있다는 것.... 서라운드 입체음향이 훨씬 좋은 소리라는 것.
상상해보지만.... 결코 어떤 것인지 난 모른다.
단  크락션이 크게 울릴 때 내 뒤에서 날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경험적으로 판단하고
좋은 음악은 서라운드에서가 아니라 내가 동의할 수 있고 내 가슴조차 흔드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난 온통 세상의 왼쪽 소리에 민감하고
세상의 희망 역시도 왼쪽에 있다는 것이 결코 낯설지않고 익숙하다.
난  스스로 차이를 극복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나를 잘 알기에 나의 왼쪽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의 배려가 그 어떤 모습보다도 내겐 감동적이고 따뜻하다. 나에게 사람들의 따뜻함은 항상 왼쪽에서 느껴진다.

날개 한쪽으론 결코 날수없어도 내게 희망은 오직 왼쪽날개 하나로 비행한다.
육체가 창공을 나는 "정상"의 경계에 서기보다는
희망과 꿈이 높이 비행하는 것이 더 아름답기 때문이며
오직 한쪽날개만이 날아올라야하는 존재의 숙명에 대한 증거이며 그 비행의 간절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한쪽... 왼쪽날개만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난 왼쪽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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