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소설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소설을 통해 그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토지의 박경리, 태백산맥의 조정래, 장길산의 황석영은 위대한 작가로서 저가 닮고 싶은 사람들 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황석영은 타고난 소질과 시대 정신까지 갖추었습니다. 미학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자칫 관념적이 되기 쉬운데 그는 사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도 뛰어납니다.
문학적 영감, 과학적 상상력이 현실 정치와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너무나 우편향되어 있어 제대로 된 과학적 상상력을 할 교육의 기회나 자료가 대단히 부족합니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보나 보수나 좌파나 우파나 마찬가지입니다. 극우가 보수가 되고 편견이 진보 좌파가 되는 것이 지금의 우리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황석영이 어떤 말을 해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독히도 현실주의자입니다. 더구나 그는 돈키호테에 버금갈 정도로 계산적(정치적)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번 사건은 과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그의 뛰어난 문학적 영감이 만들어 낸 허술한 현실 참여의 전형입니다. 그는 작가로서만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소설 장길산을 사랑하고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골의 삼류 소설가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도.
이번일로 인해 진보 좌파에서 보여 준 행태는 예상했었고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가 중도라고 믿어 온 우파 정치인들과의 교분을 쌓을 때부터 불안했습니다. 이명박과는 전 부터 교분이 있었고 사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우리 정서상 충분이 실용 중도 보수라고 믿을만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황석영의 이번 일을 배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요. 아마, 그는 이명박을 통하여 통일의 꿈을 이루려고 할 것이고, 이명박은 궁지에 몰려 있는 정치적 입장을 황석영 카드를 통하여 풀어 볼려고 할 것입니다. 황석영은 그것이 한시적이라고 못 박았고.
제 생각에는 계산적이지 못한 황석영이 당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저는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황석영이 추악한 현실정치에서 벗어나, 마지막 그의 노년을 문학을 위해서만 전력투구 하길 바랄 뿐입니다.
진보신당에서 보여 준 그에 대한 반응은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볍고 충동적이고 정치집단이면서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마치 물에서 노는 어린아이 보듯합니다. 그렇게 쉽게 움직이어서는 안됩니다. 설사 그가 그렇더라도 한번쯤 뜸을 들여야 합니다. 황석영이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가 황석영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또 다른 시선입니다. 제가 말하는 바는 정치적 계산입니다. 정치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합니다. 선거 때만 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관리를 해야 합니다. 이런 아마추어리즘으로 어떻게 정치를 합니까?
게다가, 아직 황석영의 행적은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난리를 친다면 삼류 언론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중심에 진중권이 있습니다. 진보 논객으로 진중권은 당 게시판의 여론을 주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진중권을 경계합니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이런 식의 반응은 어린 아이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제 진보신당은 진중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중권식 어법과 비판으로는 정치를 하기 힘듭니다. 당장 열광적인 팬들을 모으기는 쉬울 지 모르지만 정치 정당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런 식의 진보신당은 발전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진보정치도 요원합니다. 실익도 없습니다.
참고로 강준만의 진중권 비판에 대한 글 전문을 퍼다 올립니다.
첫 페이지만 읽고 책을 던져 버린 진중권
"진중권이 진지하게 반성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그것을 호소한 강 교수는 아직 진중권을 모르는 것이구요) 소위 논객이라는 자가……『월간 인물과 사상』을……첫 페이지만 읽고 던져 버렸다니……에라! 이런 인간이 소위 논객이라니! 정말 대한민국의 사회주의자 수준 진보의 수준이 한심하다!"
어느 분께서 위와 같은 안내문과 함께 내가 『월간 인물과 사상』 7월호에 쓴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는 글에 대해 진중권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짧게 논평(?)한 글을 퍼다 <인물과 사상> 홈페이지에 소개해 주셨다. 덕분에 진중권의 글을 일찍 읽게 된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관련기사]
강준만,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단행본 <인물과 사상> 23호, 개마고원)
강준만,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 <인물과 사상>(7월호)
강준만, '서울시장 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물과 사상>(6월호)
진중권, [반론] 다시 ‘이문옥과 국민사기극’으로
{IMAGE1_LEFT}진중권은 내 글에 대해 반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긴 첫 페이지만 읽고 던져 버렸다니 반론도 할 수 없을 게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진중권은 6.13 지방선거 이전부터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강준만을 손보겠다"고 공언해 왔으며, 선거 기간 중에도 선거가 끝나면 나와 본격적인 논쟁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히지 않았던가? 이젠 선거가 끝났으니 선거용으로 썼던 글에 대해 책임지기는 어렵다는 걸까?
이상한 일인 동시에 유감이다. 왜? 한국의 언로(言路)엔 '힘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글쟁이들이 도무지 긴장을 하지 않고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누군가가 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더라도 무시해 버리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왜 반론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론을 하지 않는 게 대범하다고 칭찬을 받는다. 일일이 반론을 해주는 사람만 바보 된다. 그래서 수구 논객들은 마음놓고 글을 & #43088;개판& #43089;으로 쓴다. 이젠 '좌파 논객'이라는 진중권까지 그런 풍토에 오염된 것 같아 안타깝다. 진중권은 반론을 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고 말하겠지만, 과거 진중권의 비판을 받았던 수구 논객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진중권은 왜 반론을 하지 않겠다는 걸까? 혹 "스스로 '반칙'임을 자인하면서 수많은 반칙들을 너절하게 저질러 놓았더군요.……논리적으로는 이미 끝난 게임입니다. 그래서 '반칙'을 하겠다고 선언해야만 했겠지요"라는 진중권의 말에 답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진중권이 말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나는 진중권과의 대화를 위해 그걸 & #43088;디지털 논리& #43089;라고 완곡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논리 체계를 존중해 주어야 대화가 될 것 같아 진중권의 논리 체계에 수긍하지 않는 나의 주장은 진중권의 논리 체계로 보면 '반칙'으로 보일 것이라는 자상함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진중권은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해 펄펄 뛸 것이다. 그는 '이것은 논쟁이 아니다'고 주장할 것이다. '반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진중권의 논쟁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까 자신의 '게임의 룰'을 내게 강요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면 진중권이 말하는 논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메바 논리'다. '디지털 논리'라는 표현은 대화를 위한 과공(過恭)이었다. 왜 '아메바 논리'인가?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진중권은 어린 아이와 비슷하다. 아니 어린 아이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를 따지는 어린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예컨대, 진중권은 집요하게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려왔다. 물론 이문옥 선거운동을 위해 써먹을 카드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주장은 그러한 물음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이다. 사안별 질적 분석을 해야 하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뜻과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민주노동당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건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중권은 계속 떼를 쓴다. 무슨 경우를 막론하고 지방선거가 대선의 전초전인지 아닌지 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자 택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나의 답은 진중권에겐 '반칙'이 된다. 또 진중권이 실제로 이문옥 선거운동의 운동원으로 활약했던 텍스트 밖의 현실을 텍스트와 연계시키는 것도 진중권에겐 '반칙'이 된다. 그래서 내가 "중권아, 착하지. 그래 그래 좋은 나라도 있고 나쁜 나라도 있지. 근데 그 중간에 있는 나라들도 있단다"라고 달랜 게 아닌가. 그래도 중권이는 말을 안 듣고 손에 잡히는 걸 마구 던져대면서 이젠 나하고 안 놀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게 아닌가.
진중권의 상습적인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
자, 독자들께서는 지금 무얼 느끼는가? 내가 아직도 위와 같이 무언가 자꾸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걸 보고 내가 미련할 정도로 어리석고 답답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진중권과 성실한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나의 노력은 미련할 정도로 어리석고 답답한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새로운 인간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진중권에 대해 놀라움과 더불어 경이감까지 느끼고 있지만, 내가 진중권이 어떤 사람인지 그걸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알면서도 당해야 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께서는 어떤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걸 알고 있을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처음부터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대접하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단은 선의의 대접을 해줄 것이다. 그 사기꾼이 점점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수준에 따라 이쪽의 대응 수준도 다르게 하면서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러서야 "야, 이 사기꾼아!"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진중권 비판도 마찬가지다. 내 글은 진중권의 언어적 폭력성이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강도가 높아져, 나는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는 글에선 진중권이 '궤변가'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나는 그 글에서 충분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 글은 그 글의 속편이다.
지금 내가 쓰는 '궤변가'라는 말은 흔히 말싸움을 하다가 상대편을 비하하기 위해 써먹곤 하는 일회성 용도의 것이 아니다. 나는 논쟁적인 글에 한하여 진중권이 갖고 있는 주된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더 큰일날 소리가 아닌가. 강준만은 매우 부당한 인신공격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그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물론이다. 나는 '책임' 빼놓으면 쓰러지는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것인가? 일단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보겠다. 이 글과 『인물과 사상 23』에 실린 진중권 관련 글 여러 편을 읽어 보시고 의견을 주시기 바란다. 나는 진중권이 그간 저지른 모든 궤변을 분석해 고교생 및 대학생들의 논리 공부용으로 이용될 수 있게끔 책으로 낼 생각이 있다. 다만 요즘 내가 한국 현대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데다 그 작업이 오래 갈 것 같아 단지 생각으로만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중권은 궤변가'라는 나의 판단으로 제시된 증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면, 나는 내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만사 제쳐놓고 그 일부터 하겠다.
지금 독자들은 나의 '자신만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진중권과 논쟁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놀라움은 더해 갔다. 진중권의 글은 시종일관 사실에 대한 교묘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누굴 지지하느냐 하는 정치적 판단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어떤 주장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진중권이 텍스트주의자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 역시 그를 텍스트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과공(過恭)이었다. 진중권을 텍스트주의자라고 부르는 건 진짜 텍스트주의자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진중권은 텍스트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법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으로 요리를 하고야 만다.
진중권은 왜 그러는 걸까? 이건 진중권의 인성(人性)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라 말을 아끼겠다. 진중권 자신이 한 말에 근거해 조심스럽게 살펴보자면, 진중권의 논객 행세는 장난, 놀이, 또는 오락 행위다. 진중권은 남을 약 올리고 골탕 먹이는 데에서 쾌감과 더불어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진중권은 남 약 올리고 골탕 먹이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워낙 천부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나는 그간 진중권의 그런 행위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몇 명의 네티즌들에게 개인적으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자기들이 볼 때에 진중권은 '매우 나쁜 X'인데, 왜 자꾸 내가 진중권을 칭찬하는 글을 써대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싶어 진중권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 진중권 자신을 위해 자제할 것을 요청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진 않았다. 왜? 이 글 자체가 좋은 답이 될 것이다.
"강간범의 글쓰기"
내가 진중권에 대해 뒤늦게 깨달은 것 하나는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이 바로 진중권이 상대편의 약을 올리는 의도적인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중권이 독설로만 약을 올릴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중권이 지난 1999년에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발언들을 하는 걸 지켜 보면서도 그게 바로 이런 뜻일 수도 있었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버나드 쇼가 살았던 시절처럼 독설을 그냥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해 그냥 가볍게 받아넘기는 분위기가 되어 있다고 믿었는데, 한국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joker가 장난을 치기에는 너무나 도덕적이고, 인격적이다.……사실 독일에 있을 때만 해도 그냥 웃고 즐기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좀 달라지더군요. 갑자기 화가 치밀 때가 있어요. 그래서 조만간 다시 외국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외국에서 편하게 즐기다가 한국에 와서 좀 놀아 주다가 다시 나가고, 뭐 이런 것이지요. 외국에 있으면 편하고 좋은데 심심할 때가 있거든요."
진중권은 자신을 독설가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중권은 독설가라기보다는 궤변가다.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은 독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건 일종의 사기 행위다. 진중권 자신이 만든 표현을 진중권에게 되돌려 주자면, 진중권의 글쓰기는 "강간범의 글쓰기"다. 이는 과거 변희재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강간범의 글쓰기"라는 게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관련기사]
변희재, [인터뷰] 상식적인 좌파, 진중권, 대자보 24호(99.11)
변희재, 진중권. 니 얼굴에 침을 뱉으마!, 대자보 9호(99.4)
내가 진중권의 그런 면모를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건 아니다. 진중권이 3년 전에 쓴 <강준만: 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의 지식인 혐오증?>이라는 글이 바로 "강간범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글을 진중권의 '의도'가 아니라 '실수'로 받아들이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기에 공개하는 것이지만, 나는 당시 진중권을 좀 아는 어느 신뢰할 만한 지식인에게 진중권이 그 글로 인한 논란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경악할 만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겁이 나서 부랴부랴 진중권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그를 격려하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 이 편지에 대해 진중권은 『월간 인물과 사상』 1999년 7월호에 쓴 <내 글쓰기는 텍스트 비판이다: 논쟁은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 교수께서는 그 글을 쓰신 후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내게 사신을 보내셨다. 욕 좀 해야겠다. 촌스럽게, 사람을 뭘로 보시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다. 강 교수께서 『조선일보』 및 다른 사이비들과 싸우는 그 자리에 비록 전공이 달라서 항상은 힘들겠지만 가능하면 자주, 적어도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그 옆에 있을 테니. 이건 신뢰하셔도 된다. 아, 그리고 내가 쓴 글에서 내가 강 교수께 찬사를 보냈을 때 나는 그 말로써 글자 그대로의 것을 의미했다. 이것도 신뢰하셔도 된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가 좀 푼수다. 정말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를 저지른 사람도 그 사람이 눈곱만큼이라도 미안해하는 기색만 보이면 금방 용서해 버리고 다 잊어버린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않고, 너무 쉽게 풀어져 버린다는 말이다. 너무 뒤끝이 없는 것도 탈이다.
"강준만을 손보겠다"
나는 진중권의 위와 같은 글에 감동(?) 먹고 진중권의 '강간범의 글쓰기'를 단순한 실수로 넘겨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내가 얼마나 진중권 칭찬에 열을 올렸는지 잘 아시잖는가. 진중권은 모든 게 글쓰기 방식과 관련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뿐 자신의 글은 정당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당시 진중권이 쓴 그 문제의 글의 한 대목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는 '서울대 망국론'을 썼다. 그런데 김대중은 우연히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둘째로 그는 전라도 지역차별을 비판했다. 그런데 우연히 김대중은 전라도 출신이다. 셋째, 그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을 비판했다. 그런데 TV를 보니 우연히 김대중이 다리를 전다. 여기서 난 우연히 우연성 이상을 본다. 그리고 내게 우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제기해야 할 문제를 정치적 의도로 제기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굳이 논평할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진중권은 이게 정당한 텍스트 비판이라고 주장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진중권은 지금도 계속 이런 식, 이런 수준의 비판을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와 같은 수준의 비판에 대해서조차 일일이 답을 해주는 순진하다 못해 미련한 성실성을 보여 온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최근에서야 진중권이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심리적 배경을 좀더 이해할 수 있었다. 진중권은 호남 차별주의자다. 나는 이미 『인물과 사상 23』에 쓴 <궤변의 구조와 방식: 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진중권의 머리와 가슴 속엔 '호남 차별 바이러스'가 활개치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 글에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였으니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호남 차별 의식이 있는 사람에겐 김대중 지지는 무조건 광신적인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나는 이것도 『인물과 사상 23』에 쓴 <'DJ 광신도' 논쟁: '반(反)DJ 광신도'가 훨씬 더 무섭다>는 제목의 글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었다는 걸 밝혀 둔다.
위와 같은 주장을 정당한 텍스트 비판이었다고 우기는 사람을 따뜻하게 껴안고 칭찬하는 데에 열을 올린 나의 과오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다. 그런데 나의 과오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후에도 진중권은 여러 차례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나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제발 안티조선운동의 대의를 위해 참아 달라"는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로 진중권의 그런 '스토킹' 행위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금기시하는 건 물론 계속 진중권의 좋은 주장을 소개하면서 지지를 보내는 데에만 주력해왔다. 나에게 그런 만류를 했던 사람들 가운데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진중권은 나의 그런 착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준만을 손보겠다"는 전의를 불태워왔던 모양이다. 진중권이 시도한 게 노골적인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교묘'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진중권이 비판을 위해 내 주장을 소개하는 걸 볼 때마다 진중권이 심지어 '사악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걸 고백한다.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을 통해 자신의 가학적 충동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걸 논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중권은 논쟁을 한 적이 없다. 진중권이 나의 반론에 답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폭력적 궤변으로 일관할 망정 어느 정도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한 논쟁은 진중권의 '취향'이 아니다. 그런 글은 자신의 가학적 충동을 충족시키는 재미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반론을 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스토킹'만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진중권의 '스토킹'의 자유를 존중하겠다. 실컷 원없이 해보시기 바란다.
이제 진중권과의 '논쟁'은 진중권의 뜻에 의해 끝났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나는 진중권이 걸쳐 입은 '좌파', '진보'라는 외투에 대해 강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나는 진중권이 내세우는 '진보'가 '가짜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자면 아직은 나의 생각이 소수파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인물과 사상 22』에 쓴 <지식인의 '우상 파괴'와 '인정 투쟁'의 정치학: 이어령의 '영광'과 '고독'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권위주의적 진보'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는데, 그 소제목하의 글을 여기에 다시 싣도록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개념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가짜 진보'가 '진보 죽이기'를 할 수 있다는 나의 깊은 뜻을 좀더 많은 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권위주의적 진보'는 가능한가?
나에게 글을 보내 준 독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예컨대, 이런 경우를 가정해보자. 어느 진보적인 지식인이 있다. 그 지식인은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글과 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진보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인권을 존중하고 도덕을 강조하고 약자에 대한 애정을 듬뿍 보인다.
그런데 그 지식인은 사적 삶에선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그런 태도로 인해 그의 주변에선 온갖 종류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그가 공개적으로 떠드는 말과 글은 어차피 실제 삶과는 좀 동떨어진 것인 반면 그의 태도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인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념과 태도(이후 '행태'라고 부르자)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 오직 그의 이념에만 주목해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인가? 사실 이건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이미 지식인을 그런 잣대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인이거나 다른 사회적 공인을 그런 식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 그의 사적 삶에 접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 #43088;딜레마& #43089;라는 문제 의식만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한국 사회 일각의 '진보'에 대한 알레르기도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 태도(이념과 행태는 별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태에 대한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는 태도)의 총합이 미친 영향이 매우 크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대중 정권의 실망스러운 작태도 이념과 행태를 분리한 분리주의적 편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 정권은 이념에선 역대 정권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행태에선 그렇지 못했고 그게 민심 이반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제 진보는 행태까지 포함한 종합 게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적 삶에서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진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믿는 신념과 관련된 독선까지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열려 있는 논쟁'으로 얼마든지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사람의 독선이지 확고한 신념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내게 글을 보내 준 독자는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현실참여적인' 사람에게는 몇 퍼센트의 허영심이 들어 있는지, 또 나의 경우엔 어떤지, 하는 걸 물어 오셨다. 나는 이건 일종의 '언어 게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는 '허영심'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허영심'을 넓게 정의할 경우 이 세상의 존경받을 만한 공적(公的) 활동 가운데 허영심 아닌 게 무엇이 있을까? 유관순, 안중근, 이순신 등등 한국사에서 존경받은 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애국심은 허영심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그들의 애국심을 '인정 욕구'로 본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인정 욕구'는 허영심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허영심의 유무와 정도는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게 없다고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고 그게 있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언행의 옳고 그름과 지속성 및 일관성을 갖고 따지는 게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허영심을 포함하여 한 인간의 행태는 공사(公私) 영역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아직 그 경지에까지 이르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걸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수구적 논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수신제가'의 논리에 수구성이 숨어 있는 건 사실이나, 행태도 자기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음모'까지 껴안고 가자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사적 삶에서 민주적이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열려 있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진보'는 허깨비거나 신기루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나 자신에게 해보는 소리다.
'김대중 신드롬'과 '진중권 신드롬'
위와 같은 문제 의식에 비추어 볼 때에, 진중권은 좀 색다른 경우다. 나는 진중권이 사적 삶에서도 매우 착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위 글에서 말한 '사적 삶'은 진중권의 경우엔 그의 논쟁적 글쓰기 행태에 국한시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은 논쟁적 글쓰기를 할 때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바뀐다. 자신이 '진보', '좌파'의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은 『조선일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된다. 나는 적어도 『조선일보』 비판과 범개혁 진영 내부의 비판은 각기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적용시켜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셈인데, 진중권에겐 그런 구분이 없는 것이다.
나는 폭력적인 궤변으로 '진보'의 목표는 달성될 수 없으며 달성된다 한들 그건 '가짜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역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진중권과의 논쟁 방식보다는 내가 제3자적 입장에 서서 역설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에, 나는 진중권이 내 반론을 내팽개치는 '땡깡'을 부린 걸 반기는 점도 있다는 걸 밝혀 둔다.
그간 진중권과 논쟁을 하면서 내가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내가 평소 아주 괜찮은 지식인이라고 믿고 있던 분들마저 내게 진중권과 싸우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었다. 물론 다 좋은 뜻을 내걸고 하는 말이었지만, 그들이 이 논쟁을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개인들간의 감정 싸움 비슷하게 보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바로 이런 풍토가 그간 진중권의 폭력적인 궤변의 보호막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