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서평

by 모지리 posted Jul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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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일부는 창비 가을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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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의 재현 - “거대한 전환” 서평


정태인(경제평론가)


2009년에도 행복은 있다


행복이라는 낱말이 얼굴을 내밀 틈이 전혀 없을 것 같은 2009년 대한민국이지만 난 지난 몇 개월 동안 행복을 누렸다. 지난 봄에 나온 스키델스키의 “케인스”, 그리고 방금 나온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두권의 책 때문이다. 게으르기 그지없는 내가 한 글자도 빼 놓지 않고 다 읽은 것은 우선 두 책의 내용이 흥미진진하고 또한 꼼꼼하며 감칠 맛나는 번역이 횡재의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라는 시기의 엄중함 역시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두 책은 좋은 번역자를 만났을 뿐 아니라 좋은 시기마저 택한 셈이니 지하의 두 저자가 만면에 미소를 지을 일이다. 그러나 두 책이 ‘자유방임주의’(케인스), ‘시장자유주의’가 초래한 파국을 막기 위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좋은 시기’를 만난 것이니 마냥 행복할 일만은 아니다.


케인스의 “일반이론”(General Theory)는 1936년에, “거대한 전환”(Great Transformation)은 1944년에 출간됐다. “평화의 경제적 귀결”로 이미 대중적 명성을 얻은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즉각 환호와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거대한 전환에는 거의 아무런 반향도 없었다. 하지만 폴라니는 역사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실천가로서 광범한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삶의 다양한 경험이 흘러들어 일가를 이루고 또 거기에서 남은 생의 이론과 실천이 비롯된 원천이 바로 “거대한 전환”이다.


따라서 이 책을 둘러싼 논쟁도 그만큼 많고 해야 할 얘기도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프레드 블록과 같은 당대 일류의 학자들의 서문, 그리고 역자인 홍기빈의 훌륭한 발문이 붙어 있어 있으니 독자들은 책 안에서 바로 권위있는 해설을 만날 수 있다(따라서 먼저 이 글들을 읽어 보시라고 추천한다). 하여 나는 요약과 해설을 모두 생략하고 65년 전에 나온 이 책이 현재의 상황에도 유효한가, 그리고 책 말미에 어렴풋이 제시된 대안의 방향은(폴라니의 다른 저작들도 참고할 때) 여전히 옳은가, 여기에만 집중할 것이다.


현재성 : 대공황과 글로벌 금융위기


거대한 전환은 19세기로부터 시작해서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른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시장의 단일 원리로 사회를 조직할 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은 도저히 상품화할 수 없는 인간, 자연, 화폐마저 ‘허구의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물론 그 과정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주장대로 자연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었고 기실 ‘국가계획’에 의해 진행됐다. 영국의 1834년 구빈수정법(구빈법의 폐지와 노동시장의 확립), 1844년 필 은행법(금본위제의 채택과 중앙은행의 설립), 그리고 1846년 반 곡물법(자유무역주의의 채택)이 핵심 수단이었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이중의 운동’의 첫 번째 운동이며 그 결과 사회는 파멸로 치달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며 그것이 두 번째 운동이다. 이 두 번째 운동은 물론 사회운동(예컨대 노동조합과 최저임금법)이 핵심이지만 보수집단의 저항(예컨대 스피넘랜드법)이나 부작용을 막으려는 관료들의 실용적인 정책(예컨대 보호관세)도 모두 포함된다. 거대한 전환은 이러한 이중운동에 대한 경제사적 기술이며 시장자유주의의 허구성에 관한 이론적 증명이다.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으로 파국을 맞아 사멸했던 ‘시장 유토피아’는 불행하게도 1980년대 이래 글로벌 차원의 신자유주의로 부활했다. 노동 상품화를 한층 진전시킨 노동시장의 유연화(예컨대 한국의 비정규직법), 자연의 상품화와 사적 소유권의 강화(예컨대 투자자국가제소권), 금융화의 급진전(자본의 완전한 자유이동과 무역자유화) 등이며 이는 워싱턴 컨센서스(개방, 민영화, 긴축), 그리고 이런 이념을 모든 나라에 강제하는 IMF의 대출조건과 WT0 설립(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의 자유화), 그리고 개별 FTA로 최고조에 달했다.


또 다시 사회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국가, 지역 등 각 차원에서 진행된 사회의 양극화, 인류의 절멸까지 우려하게 만드는 기후 온난화,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그것이다. 물론 폴라니의 이중 운동도 나타나고 있다. 노동 유연화에 대한 저항, 생태주의 운동, 1999년 시애틀에서 폭발한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 FTA 반대 운동 그리고 현재 논쟁 금융규제 방안 및 IMF의 출자 구성 전환, 각국의 자연보호입법 및 사회보호 입법(예컨대 오바마의 건강보험 도입 정책) 등이 그것이다. 위기의 대안이 뚜렷하지 못할 때 발호한 파시즘의 가능성마저 폴라니의 시대를 닮았다. 과연 세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더욱이 한국에서 지금 이명박 정부가 밀어 붙이고 있는 비정규직법 개악,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말 그대로 “완전한 파괴로 향해 뛰어드는 것(plunges into utter destruction)"이다. 파국이 증명됐는데도 더더욱 시장만능의 정책을 사용하는 만큼 인간과 자연의 생명은 바야흐로 절벽 끝에 몰렸다. 


대안 : 결사체 민주주의가 찾는 대안적 제도를


연전에 나는 지역공동체 수준의 ‘풀뿌리 경제(social economy)’,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공공 경제’(네트워크산업, 가치재 산업, 그리고 체제재 산업), 그리고 그 위에 ‘시장 경제’가 존재해야 생태적인 평등경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박자 경제론”을 제출한 바 있다. 각 경제 단위는 상호성(reciprocity), 공공성(publicity, 또는 재분배), 그리고 경쟁(competition)의 원리를 따르며 이 세부분이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설정했다. 사회주의란 전 사회를 공공경제 영역으로 환원했고 자본주의란 전 사회를 시장경제 영역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니 “세박자 경제”야말로 인간의 여러 속성에 맞는 구성을 지닌 구상이라고 내심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거대한 전환”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기본적으로 폴라니가 인류 역사상 세상에 존재했던 경제 원리로 정리한 상호성, 재분배, 시장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저 옛날 대학원 때 읽었던 것들이 의식의 심연에 스며들어 있다(embedded) 시론을 쓰고 정책을 입안할 때마다 슬슬 기어나왔고 결국 폴라니를 따라간 것일까? 나는 케인즈가 일반이론 마지막 페이지에 쓴 바, “일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지적 영향도 받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라는 문장을 증명한 셈이다. 


이번 서평을 쓰면서 찾아 본 폴라니의 후계자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각종 반대 운동에 내재해 있는 제도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하위 시스템으로 연결해 나가 결국 전체 시장시스템에 도전하려는, 광의의 제도주의 작업을 하고 있다(특히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 이들이 특히 사회적 기업이나 마이크로 크레딧 등 ‘풀뿌리 경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폴라니 사상의 현실화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제 폴라니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는 변화의 원리,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현재의 거시경제 메커니즘를 밝혀야 하는데 이야말로 그것이야말로 케인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방향만 말한다면 일반이론의 ‘소득의 거시경제학’을 넘어 ‘자산의 거시경제학’을 만들어야 한다) 


폴라니는 또한 맑스주의 고유의 난점인 ‘계급과 대중의 괴리’문제도 해결해 줄지 모른다. 특히 산업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단기 이익에 빠진 현실(로버트 라이쉬가 적절하게 묘사했듯이 대기업 노동자들은 동시에 소비자이며 투자자가 되었다)에서 이들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자기 고유의 이익마저 지키지 못하리라는 폴라니의 지적은 날카롭다(제13장, 제15장). 즉 폴라니에게 계급과 그 역할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이익집단과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시장시스템의 폐해를 막아낼 때 비로소 이중적 운동의 주역(agency)가 될 수 있다.


폴라니에게 사회주의란, ‘복합사회의 자유’를 더욱 확대하는 (결사체)민주주의에 다름 아니다(제21장). “사회주의는 그 본질에서 자기조정 시장을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민주적 사회의 명령 아래에 의식적으로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이는 산업 문명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경향이었다. 이는 산업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해결책이었다”(p559) 시장을 다시 사회에 '묻어들어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해야 할 일이며 이는 틀림없이 산업노동자와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현재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답답함은 임박한 뇌성벽력의 전조임에 틀림없다. 이 책, “거대한 전환”에 위기의 근원, 그리고 해법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여기에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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