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법처리를 통해 드러난 한국정치의 관습 ‘관습’의 관성을 얕보지 말라는 이은영 전의원의 고언 채진원 (경희대 시간강사) 지금 국회는 전쟁중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해석전쟁 중이다. 미디어법 직권상정여부를 둘러싸고 벌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간의 교착과 파행, 한나라당내부의 계파갈등, 언론노조의 총파업은 민주주의를 다수주의로 해석하자는 쪽과 그렇게 해석하지 말고 토의민주주의 혹은 공화민주주의 쪽으로 해석하자는 쪽간의 쟁투이다. 토의민주주의나 공화민주주의는 공공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소수파가 제기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제3의 의견까지도 즉,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의 관점에서 더 바람직한 의견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서로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을 추구하면서 일종의 컨센선스(통합)와 신뢰를 추구하는 민주주의다. 만약 민주주의를 다수주의 내지는 다수파 독재로 해석한다면, 민주당도 언론노조도 한나라당 다수파의 의견을 존중하고 승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다수주의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다수주의는 민주주의라기 보다는 다수파의 전횡과 독단으로 다가와 소수파와 제3의 의견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민주당 역시 그동안 민주화 이전시기 민주주의를 다수주의로 해석해온 많은 사람들의 관습과 관행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토의민주주의와 공화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설득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투표중심’에서 ‘심의적 대화주의’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이 같은 곤란과 딜레마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일사분란한 공격과 방어라는 집단행동을 위해 당론과 당기율 및 공천권을 가지고 의원들을 구속하고 단속하며 동원하려고 한다면, 이미 고정된 당론의 관철만이 있을 뿐이지 당론을 초월하는 더 좋고 합리적인 안과 의견을 발견하기 위한 토론과 대화 및 신뢰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선호와 이익 및 정체성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당론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의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활성화시키면서 의원간에 그리고 타당간에 교차투표나 타협 및 절충이 가능한 원내정당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내정당화가 정착될 때 다수파든 소수파든 쪽수에 얽매이지 않고 공공선과 공익이라는 명분과 대의를 놓고 대화하고 설득하고 쟁투할 수 있다. 필자는 앞서 지적된 민주주의가 ‘다수결 투표중심’에서 ‘심의적 대화주의’로 전환되지 못해 발생하는 곤란과 딜레마를 보면서, 개혁과 진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새삼 느낀다. 특히, 좋은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사람들은 한번쯤 관습에 대한 깊은 통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에드먼 버크가 지적했듯이, 왜 전통과 기존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진보와 개혁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혁과 진보가 힘들고 어려운 배경에는 보수라는 외부 탓보다는 내부 탓 또는 자기 성찰 및 엄격한 자기준비 부족의 탓이 큰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화이트헤드가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사회의 관습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려 했기 때문에 공포정치로 귀결되었다”는 말처럼, 개혁과 진보세력의 가벼움과 좌익소아병에서 빚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즉, 오랜 시간 축적된 전통과 관습이 주는 관성의 법칙에 대한 충분하고 합리적인 통찰없이 급진적인 법률과 제도개선으로 밀어붙이려 했을 경우 그 반발력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것인가 그리고 그 반발력에 진보와 개혁이 죽을 수도 있으며 그 반동의 힘으로 더 전통과 관습을 고착화시킬 수 도 있다는 것을 숙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관습에 대한 통찰과 합리적 개선뱡향이 없는 조건하에서의 진보와 개혁은 극단적인 이념주의와 극단적 행동주의라는 만용을 불러올 뿐이다. 특히, 서양 최고의 전쟁철학자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적을 공격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적보다 3배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한국의 진보와 개혁세력은 오히려 보수세력보다도 힘도 없으면서, 급진적인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관습에 대한 통찰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혹은 미국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운미팅’에 흐르는 미국인의 밑바닥 모럴(관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막스 베버도 이러한 관습의 중요성을 포착한 상태에서, 『프로테스탄스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어쨌든, 관습의 관성을 얕보지 말라는 이은영 전의원의 고언은 모두에게 쓴 약이 될 것이라 믿으며 인용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2004년 5월 31일 17대 국회의원으로 취임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법학박사를 받고 25년의 법학교수로 일하면서 법률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다가 겁도 없이 현실정치에 뛰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법은 책 속의 법과 아주 달랐다. 처음에는 법률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오판했다. 부지런히 법률을 만들어낸 결과 국회에서 제일 열심히 법률을 만드는 국회의원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2년이 지난 후부터는 이건 아닌데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법률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쳤다. 그런 회의와 함께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무능하게 느껴 자책감에 빠진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다. 진보세력이 모두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고 내가 속해 있던 열린 우리당이 휘청거리며 만 4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소멸을 목전에 둔 시한부의 운명에 빠졌다. 며칠 전 개원 3주년 기념식 현판을 바라보며 나는 3년 동안 과연 무엇을 했나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얼마 전 나는 나름대로 그 해답을 찾았다.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법률이 아니라 관습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관습의 정치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면서도 그 관습을 바로 보지 못했다. 관습 중에는 마약과 같은 관습이 있다는 사실과 한국 정치를 망치는 것은 그 나쁜 관습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관습의 정치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철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정치인으로서 했어야 할 일은 관습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좋은 관습을 살리고 나쁜 관습을 없애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중략) 나는 17대 국회의원으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 관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실제 정치권 안으로 들어온 후에는 관습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갖고 현실 정치를 지배하는 가하는 사실을 절감했다. ... 내가 발견한 것은 ‘관습’과 ‘개혁’이 현실 정치의 장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이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관습과 개혁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무겁게 두는냐의 차이라고 여겨졌다. ...나는 정치에 참여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정치관행을 떨쳐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함락되지 않은 요새와 같이 견고해서 한 사람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었다. ...한국 정치는 아주 변화무쌍했다. 그래서 볼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아주 빠르게 변하는 한국 정치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변하지 않고 면면히 내려오는 관습이 있었다. ...변화만을 쫒는 사람은 그대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관습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 관습이 보이지 않을 따름이었다... 관습은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강한 척 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한국 정치의 숨통을 조여드는 무서운 존재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관습을 너무 얕보았다. 개혁입법에만 골몰해서 관습을 바꾸는 일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개혁을 높이 부르짖던 진보정당들이 제대로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한 이유는 한국 정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관습을 보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은영, 『관습의 정치』(박영사, 2007), pp. 머리말~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