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온전하게 나를 둘러싼 삶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지금도 이 길을 비척거리며 걷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괴감.
대면을 회피하고 싶지만 끊임없이 다가서는 세계의 질서라는 것을 뿌리치지 못하기에 좌파의 윤리성이라는 외피를 입고 자기방어 기제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비겁함.
세상이라는 사막을 무대로 관객 없는 일인극의 배우가 된 극한 고립감을 느꼈기에 대중화된 운동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기주의.
미칠 것 같았고 터져 나오는 속절없는 회의감이 봄날 사쿠라처럼 나에게서 만개할 때 “만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타인이다.”라는 샤르트르의 말처럼, 모든 관계가 낮선 이질적인 타자와의 관계로 비춰질 때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은 지금도 억누를 자신이 없는 무언가로 다가옵니다.
‘진보신당의 간부이며 구의원이라는 놈이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관적이어서 무얼 하겠는가.’라고 비판도 할 수 있겠지요.
맞습니다.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전 역설적으로 변혁이라는 것이 인간의 이성을 보편타당성과 윤리적 원칙으로 세울 수 없다는 비관성에 서 있기에 서투르나마 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과의 참된 소통에 목말라서 보다 나은 공동체를 장대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목말라 했던 것 아닐까요. 때문에 근거 없는 낙관주의(optimism)보다 때로는 냉정한 회의주의(skepticism)가 저의 삶과 운동에 대한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나약하기 때문에 ‘너’라는 존재를 불러내서 서로 보듬고 상처를 살피고 위로하고, 서툴지만 함께 하려는 존재임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원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태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온 존재에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나’가 되기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라고 했습니다.
일인칭 ‘나’라는 존재의 불완전성이 이인칭 ‘너’를 만남으로 참된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소외된 자들, 버려진 자들, 탄압받는 ‘너’를 보며 ‘나’-‘우리’는 윤리적 성찰을 하며, 세계를 함께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비록 저같은 회의주의적 인간형에게도 이것은 보편타당한 참됨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진보신당 연대회의 강령에는 이런 글이 서두를 장식합니다.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형성할 때, 나는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오직 너와 만나 우리가 될 때에만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삶의 진리는 만남이요, 자유는 본질에서 사회적이다. 나의 자유는 그 만남의 공동체가 확장되는 만큼 넓어지고, 그 만남의 온전함만큼만 온전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너와 내가 평등하게 만나 서로 주체로서 우리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활동이 바로 정치이다.”
저에게는 진보신당 강령의 ‘자유, 평등,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이것이 ‘만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핵심적으로 사유해야 할 지점들로 다가옵니다.
때문에, 저에게는 소위 누군가 일컫는 ‘사회자유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사민주의’이든, ‘만남’의 실천적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선언적 명제로 편가르기가 되면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찾는 것을 포기한 채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까봐 겁이 납니다.
미안합니다.
세상의 끝도 모를 회의주의자인 제가 의원이라고, 당간부라고 활동하는 이 역설에 대면하고 있으면서, 당내 선거가 다가오면서 오만가지 추측이 오고 가길래 막걸리 한 병 먹고 횡설수설했습니다.
담에는 멋진 실천활동 보고로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