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없는 '기술적 진보'

by 클라시커 posted Oct 0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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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을 분노로 지냈다.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지난 지방선거 때 당이 서울시장 후보 공약으로 내놓은 '정보접근권' 관련 보도자료를 읽고 나서였다. 알다시피 진보신당은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 명의로 '무상 무선인터넷' 공약을 내건 바 있다. 이후에 이 공약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약간의 반향을 얻을 기미가 보이자 자칭 '진보적'이라 착각하는 민주당 후보 3인이 얼씨구나 하고 공동공약으로 내놓는 한편, 스마트폰 나부랭이 나눠주며 '우린 스마트 정당'이라 지껄였던 한나라당도 덥석 이 떡밥을 물었다. 이 과정에서 애시당초 진보신당이 이 공약을 내놓으며 강조했던 '정보접근권(의 확대)'란 가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을 뒤덮을 광역망 인프라 경쟁을 촉진하는 일이다 와 같은 한 번 쯤 고민해봐야 할 이야기들도 함께 파묻힌 것은 물론이다. 남은 것은 오로지 유권자들의 환심이나 사려는 선심성 공약이란 껍데기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 과정들이 '무상 무선인터넷' 공약의 전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최근에 우연찮게 지방선거 기간동안 선본 정책실에서 내놓았던 자료들을 '이제서야' 접했다. 그 안에는 보수 양당류의 싸구려 선심성 공약의 틀을 넘는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한국 IT 기술의 흐름이 어떻게 국제적인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고립화'가 스마트폰의 도입과 맞물리며 어떤 좌충우돌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히 고민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만시지탄이었다. 부끄러웠다. 아마 내가 이 자료들을 꼼꼼히 읽었다면 선거기간동안 상대 후보의 공약이 갖는 기술적 허점들을 공박하는 따위의 '저열한 놀음질'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기술적 영혼'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아이폰의 등장이 한국의 모바일 디바이스 시장을 뒤흔들어놓은 것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었다는 의미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 그리고 실리콘밸리로 대변되는 미국의 IT산업 - 궁극적으로는 한국 바깥의 IT 산업 - 은 양적 성장 못지 않게 '개념'을 현실화하는 질적 성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에서의 IT 산업 발전이란건 오로지 '양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IT 산업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얼마나 초고속 인터넷이 많이 보급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모바일 디바이스를 수출했는가', '세계 표준을 확보했는가' 따위의 양적 규준들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발전이란건 결국 '스펙 다툼'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기존의 45nm 공정 기슬을 뛰어넘는 32nm 공정 기술을 만드는 것은 혁신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당장 이 공정으로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고 밝히는 업체가 몇이나 되는지를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언급한 '앱 스토어'처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은 아니다. 45nm 공정보다 수율이 높은 32nm 공정을 찾는건 이미 정해진 일정한 궤적 위에서의 발전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몇몇 사람들이 '한국형 앱 스토어를 만들자'나 '독자적 OS를 만들자'라는 주장을 한국이 다시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방편이라 내놓는 것을 볼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산업 발전의 측면에서만 봐도, 이미 선도그룹이 존재하는 시장에서 후발주자로 나서봐야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IT에 대한 - 기술에 대한 - 영혼(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형편에서 한국형 앱 스토어를 만들고, 독자적 OS를 만드는 것은 결국 앞서 언급한 '스펙 다툼'의 연장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기술적 영혼'이다. 그리고 이 '기술적 영혼'은 기술과 사회와의 접점을 인지할 때에만 존재한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이니 일반 공중 사용허가서(GNU)니 하는 정보공유운동이나, 네그로폰테의 '한 어린이에게 한 개의 랩탑을'(OLPC) 운동은 (대부분 좌파에 의해) 분배의 대상이라 여겨졌던 '부'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달리 말하면 자본이 특정인·국가에게 집중되었을때 나타나는 폐해가 기술과 그 산물이 집중되었을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건데, 평소에 기술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결코 튀어나오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최근에는 이 중 정보공유운동을 바탕으로 한 정당(해적당)이 유럽권에 등장해 작지만 의미있는 결과들을 얻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노동이나 환경 문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들이 충분히 기술의 영역에서도 등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기술적 영혼'과 '진보 정치인'

 

다시 지방선거로 돌아오자. 진보신당의 무상 무선인터넷 공약은 '정보접근권'을 상정하며 '기술적 영혼'의 존재 가능성을 증명하려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정보접근권'이 '공짜 인터넷'이란 투의 싸구려 선심성 공약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가 후보와 참모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기술적 영혼'을 가질만큼 우리네 의식 수준이 고도화되지 않은 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보도자료에서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스마트폰의 도입 이래 '우리네 의식 수준'도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바닥이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바닥에 씨앗을 심었어야 했고 그 임무는 당연히 후보가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보는 그러지 못했다.

 

후보와 참모진이 '무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례가 하나 있다. 알다시피 진보신당의 후보들은 '돈이 없어' 타 당 후보들에 비해 두꺼운 공보물을 내지 못했다. 당세가 집중돼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는 노회찬의 공보물도 A4크기 4쪽(2장) 분량이었다. 심상정은 2쪽이었다. 다른 후보들이 12쪽짜리 공보물을 냈음을 감안하면, 너무 초라했다. 당원들은 물론, 선본 사람들도 이런 현실에 낙담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QRcode*란게 이미 존재했다.

 

* QRcode는 숫자정보만 담을 수 있던 기존의 바코드와는 달리, 문자정보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바코드다. 문자정보를 입력할 수 있기 때문에 URL을 넣을 수도 있어, 이미 일본에서는 이를 이용한 모바일 마케팅이 성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스마트폰이 도입된 이래 각광받는 마케팅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노회찬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선전하는 이미지만큼 기술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당에게 있어 지방선거는 당의 내용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 중 하나였다. 애초에 우리당이 16개 광역-지역자치단체장을 내놓기로 한 이유도 당선보다는 홍보에 있었다는건 공식적인 사실이다. 이 기회를 우리당의 '기술적 영혼'을 드러내는 좋은 발판으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같은 4쪽짜리 공보물일지라도 이미 나간 공보물이 유권자들에게 '초라함'만 보여줬다면, QRcode가 박힌 공보물은 최소한 기술에 대한 우리당의 '이해 정도'라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당이 내놓았던 보도자료를 첨부한다. 그래도 절망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공부하는게 더 생산적이리라. 열심히 하자.

[진보신당 정보통신 정책토론회] 서울 무상 무선인터넷 100일이면 가능하다(최종)

 

 

 

함께 읽었으면 하는 글 : 스마트 폰, 진부한 희망&진보신당 (윤현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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