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촛불’ 1주년
- ‘촛불 세력’의 분할과 반목을 바라보며
아직도 명확한 이름을 얻지는 못했고 그저 ‘촛불’이라 불리는 커다란 정치적 변동이 시작된 지 1년이 되었다. 그건 이 사건이 보인 양가성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요구가 ‘탄핵’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모였다는 것은 분명 정치적 변화의 열망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 정치적 변화라는 것이 기존 제도의 고수 및 특정인으로 향한 것은 그 변화를 추동한 보수적 기대를 말해준다.
여기까지라면 역사적으로 흔히 있었던 보수 혁명이라는 개념에 기대 촛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 대통령 선거와 정권 교체, 촛불 1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한국에서 독특한 의미의 ‘민주파’가 형성되었다고, 이들이 현 정권 더 정확하게는 현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다는 점에서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반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하면서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방벽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방벽은 현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것이다.
정권의 부패, 권력 남용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맞서 일어난 움직임인 촛불이 잠시 정치적 공간을 열었다가 이를 다시 억압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가장 간단하게는 이것 또한 민주주의의 다양성으로 보는 것이다. 촛불과 그 결과도 당연히 이렇게 다양한 해석의 프리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고, 반정치적 해석과 반정치적 행태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민주주의의 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세력들의 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경제적 차원부터 시작해서 관습까지 다양한 세력들은 서로 다른 힘이 있고, 이는 목소리의 유효성을 제약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반정치의 정치가 주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폐 세력’이긴 하지만 기존의 시민운동, 노동조합 운동 혹은 그와 유사한 모든 것을 ‘운동권’이라고 부르면서 기성 세력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제도와 흐름은 모두 자기 이해에 사로잡힌 편협한 것이고, 자신들은 새롭고 순수한 운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를 그저 담론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더 심층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68년 혁명을 거치면서 자리 잡은 사회적, 제도적 배치가 변동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당 체제,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제도화된 사회세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후 민주주의 체제는 안정적인 시기를 구가했다. 당시 걱정하던 비정치화는 도리어 체제의 안정을 보여주는 징표였을 뿐이다. 이런 안정적인 체제를 뒤흔든 것이 68년 혁명이었고, 이로 인해 가치 체계의 변화 및 생활세계의 민주화 같은 진전이 있었지만 1970년대 초반의 경제 위기와 함께 체제는 이러한 요구조차 수용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것은 민주주의 자체였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로 세계를 포섭한 신자유주의는 필요한 경우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형해화시킬 수 있었다. 이 속에서 민주주의는 공동 업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거나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이 속에서 사회의 해체는 가속화되었는데, 기성 제도에 대한 불신은 이를 나타내는 징표일 뿐이다.
물론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은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독특한 양상은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새로운 정치적 물결로 나타나기보다는 민주당이라는 기성 정당에 대한 기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애써 이를 개념화한다면 ‘제도화된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가가 문제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문제가 있다. 현 대통령을 일종의 고정점으로 하는 제도화된 포퓰리즘이 다양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이를 통해 ‘적폐 청산’이 이루어진 좀 더 나은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촛불을 낳았고, 현 대통령으로 집중된 공통의 요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정’일 것이다. 사실 정의라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쨌든 고전적으로 말하자면 공정 혹은 정의는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국가 공동체와 그 시민 사이의 관계인데, 분배가 얼마나 적절하게 이루어지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시민들 사이의 관계인데, 교환이 ‘등가’로 이루어지는가이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전자는 국가가 시민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참여의 실질적 권리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며, 후자는 시민들 사이에 착취, 수탈, 지배가 나타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자리 보장과 소득 주도 성장, 정치 개혁, 공정한 경제 질서의 확립 등은 궁극적으로 이를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적절한 방법인가이다.
촛불 1주년에 나타나고 있는 ‘촛불 세력’의 분할과 반목은 당장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현 정부와 현 대통령이 적절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 사이의 이견과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 ‘경멸의 폭포수’가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다양성의 공간이라면 이러한 다양성이 흐르고 서로 교차하는 과정 자체를 막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은 아직 끌 때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1년 전의 촛불을 보듬고 있을 때도 아니다.
(2017.10.28. 토, 평등 생태 평화를 지향하는 노동당 대변인 안효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