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동등한 시민의 공동체를 위하여
루쉰이 논쟁은 감정으로까지 이어질 때 진정한 것이 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강렬함과 충실함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차별과 비하의 원천이 될 때 그것은 동등자로 이루어진 정치공동체를 바닥에서부터 허무는 파괴의 에너지 이상이 아니다.
비록 사과를 하긴 했지만 종로에 출마한 새누리당 오세훈 후보가 노동당의 용혜인 비례대표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에게 했다는 하대나 고양시갑에 출마한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선거운동원이 노동당의 신지혜 후보에게 했다는 비하와 비아냥은 선거가 아무리 격렬한 대결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정치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 사이에서 할 일은 아니다. 또한 여성주의를 표방하면서 마포을에서 출마한 노동당의 하윤정 후보에 대해 ‘일베’가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의 언설을 내뱉는 것을 보면 두려움과 분노가 교차한다.
선거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런 ‘일탈’이 진영을 막론하고 나타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 청년, 그리고 모든 소수자를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일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이상이 현실에서 곧이곧대로 구현되지 않았으며, 이는 끈질긴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징후 때문에 우리가 곧장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일탈’이라는 말처럼 예외적이고 돌출적인 어떤 것이길 바랄 뿐이다.
우리가 모든 구성원을 동등자로 대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치공동체의 업무에 아무런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그럴 때에서만 그것을 ‘정치공동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계급 사이에서는 주로 선민의식 때문에,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별짓기를 통한 실제적, 환상적 만족을 위해 차별과 비하가 여전하다.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이 있고, 그것도 모자라 차별을 막기 위한 다양한 법률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동등자의 정치공동체를 위한 실질적인 토대가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번 선거에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이 소득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며,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로 이러저런 훌륭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과정과 행동도 모름지기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는 칼레의 여섯 명의 시민이 아니라 이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동등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7일
노동당 대변인
안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