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청소년 노동가수 을채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냥 민중가수죠. 하지만 저는 꼬박꼬박, 또박또박 ‘청소년 노동가수’라고 소개합니다. 청소년 노동가수 을채. 청소년이면 청소년이고, 노동이면 노동이지 이 괴상망측(?)한 짬뽕 단어는 무어냐고 많이들 물어 오십니다. 청소년 노동가수는 최소한의 제 정체성입니다. 인식되지 않는 소수자, 청소년. 진보좌파정치, 계급성, 혁명 등을 함축한 노동. 그리고 가수.
청소년이 소수자라는 사실은 잘 인식되지 않습니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말이죠. 청소년은 나이가 어립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권위와 권력이 적거나 없음을 말합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에게 권위적으로 억누르기 쉽죠. 청소년인권운동에서는
이런 것을 나이주의라고 합니다. 나이에서 파생된 권위주의, 나이주의.
청소년인권과 나이주의 철폐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직 미성숙한데, 그래도 사회적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
청소년은 미성숙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판단
능력과 주체성이 있는데 미성숙하다고 해서는 안 되지요. 청소년이 받아야 할 ‘보호’가 따로 있나요? 모든 민중이 받아야 할 복지가 있을
뿐입니다. 혹은 소수자에 대한 존중 정도?
청소년 노동가수라는 타이틀로 활동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청소년활동가로 지낼 적보다는 좀 더 인상적인
일들을 많이 겪었네요. 아무래도 청소년활동가들하고만 어울리다, 그 풀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꼰대(!)를 만나기 시작한 때문이겠지요.
공연 전과 공연 후
제가 공연을 할 때 “청소년
노동가수 을채입니다!”라고 소개를 하면, 저를 처음 본 조합원들은 약간씩 흠칫 놀랍니다. 대부분 투쟁하면서 저를 처음 보신 분들은, 청소년활동가
자체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더군요. 공연 전,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고 되바라진 태도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줄담배를 태우기에 청소년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다가 소개를 듣고 나면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중에는 용기를 내서(?) 제게 훈계를 시도하시는 분들도
있죠. ‘미성년자는 (당연히)음주·흡연을 하면 안 된다’던지, 예절의 문제로 흡연을 제지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겠네요. 윗사람 앞에서 함부로
맞담배 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그럴 때마다 매번 복잡한 마음입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주눅 들기도 한
마음이 고루 뒤섞여 있지요.
얼마 전에 무슨 법령인지 시행령인지를 개정한다고 난리를 치긴 했지만, 아직까지 청소년보호법 등에는 미성년자에 대한 술·담배 ‘판매’만 금지되어 있습니다. 대리 구매나, 음주·흡연 행위 등은 처벌 근거가 없지요. 또한 저에게는 건강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저에게 간섭할 권리가 없는 이유는 저에게 담배를 제공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일은 술을 마실 때에도 흔히 있습니다. ‘가게’에 가서 정식으로 술을 사 마실 때는 더욱 그렇지요. 친분이 없어서,
가난해서 술을 사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음주를 제지당한 일 중 가장 재미있는 기억은, ‘미성년자니까 술을 자제할 수 없잖느냐. 그냥
일찍 집에 들어가라’는 말로 홰홰 내저어 쫓아낸 분과의 실랑이였습니다.
그 분은 저와 초면이었어요. 제가 술을 자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사전정보 같은 것도 없는 정도의 초면. 그 분이 저의 음주를 제지한 이유는 오로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논리는
‘네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라는 줄기에서 가지를 쳐 나가시더군요. 그 날 밤 일부러 친구들을 불러 자제하지 않고 술을 마신 것으로 복수 아닌
복수(?)를 해치웠습니다.
청소년은 훈계나 명령의 대상이
아니다
그나마 술·담배의 문제는 워낙 단순한데다가 감수성들이 유연해진 만큼 비교적 쉬이 넘길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골치 아프고 불쾌한 부분은 따로 있지요. 말 그대로 청소년활동가들을 낮추어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초면에 혹은 동의 없이
반말을 당하는 것이 청소년들이 가장 흔히 겪는 일입니다.
사실 반말이 무조건 하대와 존중 없음을 뜻하는 건 아니잖아요? 반말하셔도 됩니다. 근데 본인들도 당하실 자신이 있다면, 말을 놓기 전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수고(?)를 치러주실 자신이 있다면, 그때 반말하십시오. 하지만 동의도 없이 불쑥 반말로 대화를 시도하시는 분들을 대할 때면 청소년들도 기분이 좋지 않답니다. 특히나 투쟁 현장에서 그러시면 더욱 기분 나빠요. 아, 이런 일도 있었네요?
어떤 집중집회였습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난장을 펴는 형식이었죠. 슬슬 사람들이 잠이 들기 시작하고, 남은 사람들도
취침을 준비할 무렵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청소년 활동가들을 향해 일갈하시네요. 명령조로 얼른 자라고.
같은 연대조직으로서 투쟁에
참여하는 동지들에게 명령조로 취침을 강요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의 청소년 활동가들은 조직 대 조직으로 공식
문제제기를 하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반응이 아주 당황스러웠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자식 같아서 그런 거다,
내가 중앙 간부다, 오히려 존댓말을 부담스러워 하는 청소년들도 있더라,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얼른 자라. 이후 꾸준한 문제제기와 논쟁을 통해
그 분이 간부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활동가들을 포함한 청소년들은 비청소년 여러분들의 자식이 아닙니다. 설령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실제
자제분들에게도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해주셔야 하겠지요? 한참 앞에서도 말했듯이 청소년에게도 스스로의 판단 능력과 주체성이
있으니까요.
반말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과 존댓말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소작농들이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소작료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갖는 것과 공평한 분배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굽실거리는 것의 차이로 느껴지네요.
‘뜻은 알았으니까
얼른 자라’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 맥락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노동자들이 가열차게 파업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사측에서 ‘너희들 뜻은
알았으니까 일단 일부터 하라’며 회피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진보의 치어리더?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특히 저는 문화활동가이자 청소년으로서 겪는 일종의 이중고인데요, 한동안 씁쓸하게 떠돌던 단어를 빌리자면 ‘진보의 치어리더’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재능투쟁의 상징 비스무리(?)한 것들 중 하나인 ‘재능아웃 플래시몹’을 다들 아시겠지요? 재능투쟁 승리를 위해
수많은 청소년/청년 활동가들이 함께 추는 그 춤 말입니다. 진보신당의 청년학위와 청소년위는 2.19 대의원대회와 3.4 통합 당 대회 때도
추었더랬지요.
근데 가끔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왜 이걸 청소년, 청년들만 추고 있지? 재능 1500일 투쟁 때도, 2.19 대대
때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분들의 표정은 ‘기특하고 귀엽다’는 눈빛이었어요. 저 혼자의 착각인가요? 시청 앞 재능 농성장에서 하는 수요문화제 때나
3.4 통합 당 대회 때도 많은 중장년층 동지들은 ‘한번 따라 해보자’ 이상을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재능투쟁 승리를 위한 ‘재롱(?)’은 우리만
떨어야 하는 건가요?
공연을 다니면서 재능이라던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현장이 몇 군데 생겼어요. 열심히 연대하고 있던 농성장에 사람이 많이
모였더군요. 공연을 했지요. 긴장을 많이 해서 실수도 꽤 했지만 어찌어찌 넘겼던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른 술자리에서 어떤 동지가
말하더라고요. “너무 다른 프로 가수들 흉내 내기에만 급급한 거 아냐? 을채는 아직 발랄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줘도 될 것 같은데.”
약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고 또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동지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씁쓸한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저에게 별로 와 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제 컨셉을 바꿀 근거로 말하는 것이 나이 말고는 뾰족하지
않더라고요.
청소년은 상큼발랄해야?
이런 일도
있었지요. 제가 비청소년 활동가들과 어떤 기획을 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처음 의견과 기획의 틀을 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주
당연하게도 제가 기획 회의 등에 참여할 줄 알았어요. 근데 회의 날짜를 통보해주지 않는 거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문의를 했더니, 오히려 저를
이상하게 여기면서 제가 할 일들이라며 회의 결과의 ‘일부’를 통보해주더라고요. 나무 탈 같은 것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탈을 쓰고 광장을
돌아다니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회의록을 요청해서 샅샅이 뒤져보았어요. 정말 제게 나눠진 일은 단지 그것뿐이더군요. 화가
나서 참여하기를 관두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감히(!) 공문 양식까지 찾아가며, 서면으로 문제제기를 했지요. 그런데 정작 답변은 대표자가 아닌
분이 ‘개인적’으로 전화를 주시더군요. 변명과 훈계 등이 더 많이 섞인 사과로 무마하려 하시던 그 목소리,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땡볕에 부직포로 만든 나무 탈 쓰기는 저도 싫고 그들도 싫고 다 싫어요. 그리고 저 별로 상큼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손재주가 없어서, 차라리 노래를 시켰으면 모를까 탈 만들기까지 시킨 건 오히려 그들의 손해였죠.
근데 지금도 궁금합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부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요? 정말 제 문제제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저는 제 안에 숨겨진 ‘상큼발랄함’이라는
능력을 외면하고 회피한 것일까요?
많은 일을 겪었고, 그걸 옮겨 이야기하니 두서는 없지만 예를 들기에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사실 청소년으로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아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노동가수’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기 싫어졌습니다.
나이주의 때문에 청소년들이 계속 소수자로
차별·억압을 받거나 착취당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잖아요? 40이 넘어도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규정하며 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일들, 이 투쟁과 운동들을 그때까지도 철딱서니 없이 계속해나가겠지요.
철들었다는 말은 체제와 기득권에 잘 굴복했다고 칭찬을 듣는 것 같아서 너무나 굴욕적인 기분입니다. 이 글을 읽은
수많은 동지들도 남은 철딱서니마저 내려놓았으면, 던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철들었다는 소리가 다른 의미로 쓰이는 세상, 철없다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세상을 위해.
을채 - 청소년 노동가수,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