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천사의 날개처럼 희디흰 옷자락과 연분홍빛 속옷이 바닥에 스르르 떨어져 쌓이자 그녀의 눈부시도록 흰 알몸이 불빛 아래
농염하게 드러났다. 불빛 탓에 잘 익은 복숭아빛으로 물든 동체, 뽀얀 우윳빛 목덜미 아래 동그스름한 어깨의 윤곽, 수밀도처럼 팽팽하고 탄력적인
젖가슴과 아직 남자를 모르는 유두(乳頭)는 연분홍빛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뿐이랴. 한 손에 쥐일 듯한 세류요(細柳腰)와 그래서 더 풍만해
보이는 둔부. 그리고 어둠을 차고 솟아오른 은어(銀魚)처럼 매끈하고 쭉 고른 두 다리. 그야말로 들어올 곳과 나올 곳, 풍만한 곳과 가는 곳
등이 한 올의 흠도 없이 조화를 이룬 완벽지신. - 야설록 작,
<대협객> 중
Scene #2
[대사]
사도 햄:
내일 당장 운동복이랑 런닝화 준비해 와!
이델: ! 아, 저기... 그러니까... 보통 체격의 여자 말이야... 평균 몸무게가 어느 정도나
돼?
사도 햄: (역기 스쿼트를 하며) 50kg이 넘는 건...
몬스터!
Scene #3
(전략) 밝게 웃고 있는 일곱 사람은 하나같이 여신 같은 미모를 뽐내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진을 본
네티즌은 "바라만 봐도 저절로 눈이 정화되네", "여신들의 총집합", "미인들의 단체 사진에 마음이 흔들" 등의 반응을
보였다. - 2012. 06. 01 스포츠투데이 「조여정, 박소현·헬로비너스와 단체샷 '안구
정화'」
아미같은 눈썹, 봉목과도 같은 눈, 앵두같은 입술
내가 읽은
무협지가 한 두 세트도 아닌데, 무협지를 읽다보면 하나같이 여성들은 아미같은 눈썹에 봉목과도 같은 눈과 앵두같은 입술이 자리잡은 얼굴에,
사슴같은 목으로 이어져, 수밀도 같은 가슴을 출렁출렁 달고 있고, 남자의 손을 타지 않은 젖꼭지는 분홍색이며, 허리는 잡으면 부러질 듯한
세류요인데, 엉덩이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풍만한 몸매를 가진 비장애인이다. 몸매는 이렇게 섹시 다이너마이트임에도 수줍음이 많아 흠모하는
대협에게 금나수로 손이라도 잡힐라치면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금새 빨개지곤 한다.
아니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려한 남성에게
자신의 몸을 더럽히려 했다는 이유로 앙칼진 비명을 토해내며 복수의 칼날을 무협지 끝나는 내내 빠득빠득 갈거나. 그러다가 이 여성이 한
<운명적인> 남성의 손에 이끌려 파과의 아픔을 겪고 나면, 그 남성의 욕망에 언제든지 몸을 내맡기는 침대 위 요부로 길들여진다. 이런
여성들은 보통 ‘무림 3화(花)’ 등 꺾이면 꺾이고 마는 수동적인 별명으로 불리거나, 은근슬쩍 남성 후기지수들과 섞여 ‘5룡 2봉(五龍二鳳)’
등의 별호로 불리우곤 한다. (절대 2봉 5룡으로 여성의 별호가 먼저 불리는 일은 없다.)
다른 케이스로는 흡정대법을 십이성까지
익히기 위해 남자의 기를 무턱대고 쪽쪽 빨아대는 통에 절세미녀임에도 무림의 공적으로 쫓기는 마녀이거나, 무공은 높지만 색욕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추한 노파가 등장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조숙녀(이지만 밤에는 요부)-남자 잡아먹는 마녀, 미녀-추녀라는 구도가 어느 작품이든 나타난다.
그리고 보통 여주는 남주에게 호감을 보이는 비장애 절세미녀 요조숙녀이거나, 절세미녀 요조숙녀로 자랄 싹수가 보이는 어린 비장애인 여성이거나,
남주의 손에 이끌려 갱생하고 마는 비장애 절세미녀 마녀가 차지한다.
호호백발 파파(婆婆)나 추녀, 장애 여성(무협지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간혹 척추장애 여성이 등장하곤 한다.)은 주인공에게 기연을 가져다주는 은거기인일 수는 있을지언정, 여주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반드시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한 몸매와 외모를 가진 여성이어야만 ‘여주의 자격’이 있다. 얼굴과 몸매가 평범해서도 절대 안
된다. 잘해봐야 비중있는 조연이다. 외모 외에 또 중요한 조건은, 남성이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릴 만큼
몸무게가 가벼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안구정화'라는 말 아래 깔린
전제는
아무리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게 아니라지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도 어떤 남성들은 여성이 마치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체라도 되는 듯 ‘여자라면 당연히 165cm에
48kg’이란다. 50kg을 넘으면 여자가 아니고, 60kg을 넘으면 사람이 아니다. 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자신들이 보기에 뚱뚱한
여성을 마음대로 비웃으며, 뚱뚱한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는 게 대단한 죄가 되는 세상. 브래지어 위아래로 살이 불룩 튀어나오는 걸 보고 마음대로
욕할 수 있는 세상. 못생긴 여성을 돼지처럼 생긴 녹색괴물인 ‘오크’라고 스스럼없이 불러도 그 누가 나무라지 않는 세상.
여성이
화장을 안 하면 예의가 없는 거고, 대중교통에서 화장을 하면 개념이 없는 것인 그런 세상에 우린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안구 정화라는 말도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성(남성에게도 쓰긴 한다.)이 나온 사진을 올려놓고 “아, 이제야 안구가 정화되는
기분이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 속에 “못생긴 것들은 눈을 더럽힐 만큼 더러워/나빠.”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게임 일러스트나 유명한 출판 만화 혹은 웹툰 등 수용층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되는 매체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골이 깊게 파인
왕가슴에 잘록한 허리, 팽팽한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멋대로 재구성되어 넘쳐나는 여성의 몸. 그 홍수 한가운데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의 한 컷이 떠올랐다. 한혜연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주인공이 모처럼 새벽녘에 동네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간 장면이었다.
과장하지도, 희화화하지도 않고 평범하고 다양한 여성들의 몸을 한 페이지 가득 담았던 그 장면.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여성들의 몸은 너무나 다양한데, 어째서 그 남성들은 여성들의 몸을 풍만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에, 팽팽한 엉덩이에, 가벼운 몸무게에 가둬두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몸을 갖지 못한 여성들에게는 어쩜 그렇게 가차 없이 조롱과 멸시를 던질 수 있으며, 나이스바디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고, 그런 몸을 갖지 못한 여성들에게 빠져드는 남성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수밀도 같은 가슴, 한
팔에 감싸안을 세류요가 아니라도
예쁜 게 좋은 게 당연하다고? 마녀가 당신의 머릿 속에서 ‘저런 몸이 예쁜
몸이다’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기 때문에 예쁘게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가. 딱 잘라 말하지만, 여성의
몸은 남성들이 함부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왈가왈부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눈요깃감이 되기 위해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수밀도같은 가슴이 아니라도, 한 팔에 감싸 안고 싶은 세류요가 아니라도, 핥고 싶은 꿀벅지가 아니라도,
이런 좋은 몸이 아니라도 나는 괜찮다. 남성들의 눈을 통해 세워진 기준에 따르면 절대 높은 점수가 매겨질 수 없는 나쁜 몸이라도, 이상한
몸이라도 불행하지 않다. 얼마든지 나름대로 행복하고 즐겁다. 그 기준이 내 기준이 아닌 남성에 기대야만 충족되는 기준이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