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의사, "고공낙하만 안 하면
돼"
계획 임신이었던 만큼 생리기간이 채 되기도 전에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다. 엷디 엷은 두 줄이 그어진
임신시약을 가지고 임신일까 아닐까 수 차례 고민해봤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몇 달처럼 느껴진 2주 가량을 간신히 참고 달려간
산부인과에서 임신 5주라며 보여준 아주 작은 점 하나로 나는 공식적인 임부가 되었다.
첫 애였고 외국이었으니 그 불안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반은 기쁨에 반은 두려움에 의사에게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뭘 조심할까 등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첫 삼 개월이 아주 중요합니다. 몸조심 또 몸조심 하셔야 합니다. 당분간 커피와 술, 담배 등은 쳐다 보지도 말고 냄새도 맡지 말고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등등의 뻔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의사는,
“보통 독일여자들은 임신 5주엔 본인이 임신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 땐 많이들 디스코장에도 가고 술 마시고 담배피고 다 한다. 당신은 지금 건강한데 임신했다고 뭘 더 조심해야 하겠나. 그냥 평소 살던
대로 살면 된다. 자전거도 타고 성생활도 계속하고 ... ”
‘응? 아... 그런거였어?’ 잠시 멍하게 바라만보고 있는 나를 보고
웃으며 한 마지막 한마디. “참 조심해야 할 게 있긴 한데...” 그럼 그렇지.
“고공낙하 뭐 이런 건 될 수 있으면 하지마
(웃음)”
허걱. 솔직히 허탈했다. 뭔가 아주 강렬한 경고들로 아직까지 내 몸의 어떤 기관도 인식해내지 못하는 태아를 머릿
속으로라도 인지하게 해 주었으면 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를 가진 것을 안 그 날부터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라는 너무도 뻔한 말을
알게 모르게 각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얘기하는 모성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고 자랐던 거다.
커피는 몸에 안 좋지? 아무래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당시 대학에서 한국사람이라도 만나면 열이면 열사람 모두에게 ‘커피는 왜 마셔요?’ 라는 소릴 들었다.
하루 한 두잔 마시는 커피는 태아에게 해롭지 않다는 신문기사를 봤었어도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잔소리엔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아이의 문제는 곧 엄마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익혔나보다. 괜히 나 때문에 아기가 잘 못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너무도 당연하게 엄마로서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 하루에 커피 수 십잔씩 마셔? 그 정도면 누구라도 건강에 좋지 않아”
“아니 많아
봐야 한두 잔정도...”
“잘 들어봐. 술이고 담배고 당신이 먹고 피워서 몸에 해로운 건 태반이나 탯줄을 지나면서 어느 정도 걸러지게
되어있어. 그런데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호르몬을 통해 고스란히 태아에게 전해지게 되지. 잘 생각해봐 뭐가 정말 안 좋은
건지.”
독일은 철저히 아이보다는 임신한 여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다. 어떤 상황에서도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임부 스스로가 하게
한다. 의사나 산파는 단지 정보를 알려줄 뿐이다. 흡연이나 알콜섭취의 여부도 참고사항이 될 뿐 해도 된다 안된다의 지침 따위는 없다.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선 흡연여성의 30%가 임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흡연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도 같이 정기검진을 받고 병원을 나온 만삭의 임부가 건물
밖을 빠져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괜히 흠짓했던 경험도 있다.
임신을 하는 그 순간부터 내가 인식하지 않아도
내 몸은 이미 자연스레 엄마가 되는 준비를 하고 있다. 자궁은 태아가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벽을 두텁게 만들고 호르몬들은 뼈와 근육을
이완시켜 출산을 대비하고 유선을 발달시켜 모유가 나올 수 있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몸에 나도 아이도 익숙해져
가는 것이고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좋은엄마 컴플렉스 졸업하기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 였다. 술도 커피도 마시고 뛰어다니며 놀러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하루 마침에 모든 생활방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독일여자들은 임신을
했었어도 별다를 바 없이 이전과 비슷한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임신했다고 해서 한국처럼 남편들이 먹을 것을 사다 나르지도 않는다.
‘착한여자컴플렉스’ 는 진작 졸업했다고 생각하며 살던 내가 ‘좋은엄마컴플렉스’ 를 깨고 나오기까지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그 과정을 겪었더라면 괴롭게 내 많은 것들을 포기했거나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자책감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만난 산부인과 의사들과 산파들은 항상 ‘네가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지 이해한다. 그
힘든 과정을 너는 지금 잘해내고 있고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는 이야기들로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것이 아이에게도 가장 좋은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엄마가 편하고 행복해야 아이도 편하고 행복할 거라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실천하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