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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2일 폐허 더미가 내려다보이는 독일 국회의사당 옥상에 한 병사가 올라서서 대형 붉은 기를 흔드는, 이 강렬한 인상의 사진은 기실 철저하게 연출된 사진이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로 미국이 막대한 국채 수익을 벌어들이고 애국적 분위기를 드높이는 것을 똑똑히 봤던 소련 당국은 칼데이에게 그와 유사한 사진을 요구했고 칼데이는 꼼꼼한 계산과 설정을 통해 이 사진을 찍었다.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의 붉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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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그리고 또 그만큼의 사람이 모르고 있듯,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격렬한 충돌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었다. 히틀러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미군의 참전이었다기보다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늪에 발을 디민 일이었고, 소련은 수천만 명의 인명을 내던진 끝에 독일을 침략을 분쇄하고 마침내 연합국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독일의 수도 베를린 시로 돌격해 들어간다. 베를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소련군은 가물거리는 독일의 저항을 마음껏 짓밟았다.

최후의 격전이 벌어진 곳 중의 하나는 독일 국회의사당이었다. 이 건물은 매우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범인인지 알 수 없는 정신이상자가 국회의사당에 방화한 사건은 히틀러의 독재를 가속화했다. 히틀러가 장광설을 퍼부을 때 하일 히틀러 소리 요란했던 이곳은 1945년 5월 그 지하실에서 저항하던 독일군의 처참한 최후를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그 지붕에서 적군의 깃발이 기세 좋게 휘날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것은 2차대전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역사에 남았다. 에브게니 칼데이라는 유태계 러시아 사진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매들을 살해한 독일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이미지적인 복수를 이룬 셈이다.

1945년 5월 2일 폐허 더미가 내려다보이는 독일 국회의사당 옥상에 한 병사가 올라서서 대형 붉은 기를 흔드는, 이 강렬한 인상의 사진은 기실 철저하게 연출된 사진이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로 미국이 막대한 국채 수익을 벌어들이고 애국적 분위기를 드높이는 것을 똑똑히 봤던 소련 당국은 칼데이에게 그와 유사한 사진을 요구했고 칼데이는 꼼꼼한 계산과 설정을 통해 이 사진을 찍었다. 깃발 자체는 식탁보 세 개를 연결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셔터를 눌러 얻은 컷들 가운데 골라낸 사진이었다. 또 깃발을 움켜쥔 병사는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아 사람이었다.

연출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의 한 장으로 남기에 충분했던 이 사진에는 또 하나의 일화가 따라붙는다. 옥상 구조물에 올라 깃발을 흔드는 병사를 떠받치는 장교의 팔이 문제였다. 장교의 양 손목에는 손목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시계는 한쪽에만 차는 법, 당연히 한쪽은 당시 소련군에게 흔했던 '전리품'의 소산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군도 시계에 대한 애착(?)을 발휘하여 손목시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베를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 세계에 소비에트의 영광을 전파할 이 사진에 망할 놈의 장교란 녀석이 손목 시계 두 개를 빛내고 있으니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일찍이 사진 속 스탈린의 주변에서 트로츠키를 비롯한 숙청자들의 모습을 없애 버린 소련 당국은 시계 하나쯤은 우습게 지워 버릴 수 있었고, '전리품'은 사진 속에서 말소된다. 그후로도 오랫 동안 이 비밀은 지켜졌다. 냉전이 끝나고 난 뒤 칼데이가 사진 원본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링컨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였던 매튜 브래디의 단언대로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눈처럼 매우 어정쩡한 속임수에도 쉽게 넘어가기도 하고 많은 착시고 일으킨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감격의 서울 수복 사진, 두 명의 국군 장병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그 사진은 1950년 감격의 9월에 촬영된 것이 아니라 7년 뒤에 촬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1950년에 촬영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파괴활동을 벌이던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이공의 도살자' 사진으로 반전 여론을 들끓게 했던 에디 아담스의 말은 그래서 경청할만하다.

"아직도 사진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사람들은 사진을 믿지만, 사진도 거짓말을 한다. 굳이 조작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사진은 반쪽의 진리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반쪽의 진리'의 가공할만한 위력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릎녀 사건"을 비롯해서 사진 한 장, 이미지 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일러 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천황에게 머리 굽히는 이명박"과 "고이즈미가 머리 숙이는 노무현"의 대비는 그래서 매우 불만스러우며, "호주머니에 손 찌른 노무현"을 굳이 부각시켰던 보수 신문들의 심통은 그래서 마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1945년 5월 2일 한 역사가 연출됐다. 해로운 연출도 아니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없으며 조작이라고 부르기도 뭐하지만 애덤스의 말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진임에는 분명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무엇이든 의심해 볼 필요는 있다. 인간과 인간의 피조물을 통틀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존재는 별로 없다.
[ 산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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