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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55년 동아일보 조판공이 ‘괴뢰’자를 잘못 넣었다가 경을 쳤던 시대가 불과 10년 전인 2000년보다 더 살갑고 가까워 보이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한쪽에서는 상대방의 죽은 국가원수와 신임 국가원수를 잡아족치자고 표어를 붙이고, 또 한쪽에서는 수십만 명이 모여 그 규탄대회를 열며 사격 표적지에 상대방 대통령 얼굴을 그려 넣는, 우리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생들도 웃어댈 유치찬란의 장군아 멍군아를 실행하고 있는 요즘이라서 그럴까.


전쟁 이후 오래도록 남과 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불렀다. 남과 북의 공식 명칭인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상대를 일컫는 사람은 남북 모두에서 그 생명이 위태로왔을 것이다. 쌍방의 군대는 무조건 괴뢰군이었고 쌍방을 뉴스에서 일컬을 때는 어김없이 “북한(남조선) 괴뢰 도당”이라구 우겼다. 즉 양쪽 다 상대를 국민과 영토...와 주권을 지닌 독립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외세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는 꼭두각시집단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1991년 소련이 망했을 때 술자리에서 오간 농담 중의 하나는 색다른 것이었다. “이제 북괴란 말은 사라지겠구나. 괴뢰를 조종할 대빵이 망해 버렸으니.” 그러나 꼭두각시(괴뢰)를 가지고 노는 주인(?)이 사라졌어도 북괴라는 호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괴뢰군도 해병대 제대했을까, “한 번 괴뢰는 영원한 괴뢰”였다. 특히 군은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북괴를 고집했다. ‘북한’이라고 부르면 군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우겼다. 하기야 스물 댓 먹은 어린 처자가 ‘해적’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심후한 사기 저하를 겪고(?) 떨쳐 일어나 고발까지 해 대는 군대의 처지라면 ‘괴뢰군’을 ‘인민군’으로 바꿔 부를 경우 그 사기가 장히 떨어졌을 것 같긴 하다.

즉 반세기가 넘도록 ‘괴뢰’란 쳐다보기도 싫고 한 하늘 아래서 있기도 싫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가리키는 단어였고, 스스로의 자존을 드높이는 단어였다. 그런데 1955년 3월 15일 동아일보 한 귀퉁이에 실린 기사는 가히 천지를 격동시켰다. 이날 동아일보 1면에는 한미 석유협정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고, 휴전선 일대에서의 북한의 휴전 협정 위반 사례를 미국이 중대시하고 있다는 기사도 1면에 함께 실렸다. 전쟁 끝난 지 2년, 북한이라는 표현조차 뭔가 어색할 때였고 당연히 조판공은 ‘괴뢰’자를 찾았다. 당시는 활판에 하나 하나 활자를 골라 꽂아서 신문을 제작할 무렵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비극이 일어났다. ‘ 괴뢰’자가 한미석유협정 관련 기사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혀 버린 것이다. 즉 ‘(한미 석유협정) 고위층재가 대기중’이라는 기사 제목이 ‘괴뢰 고위층 재가 대기중’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수가 그대로 인쇄되어 나온 것이다.

따지고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실수였다. 그러나 실수라도 식구들 밥상에서 물 쏟는 것과 회사 사장님이 처음 열어주신 회식날 커피를 그 머리에 붓는 실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구매일신보는 ‘대통령’을 한자로 찍다가 그만 큰 대(大) 대신 개 견(犬)을 갖다박는 바람에 사장이 콩밥을 먹은 일도 있었다. 대통령을 개로 만든 것도 용서가 안 되는 실수였지만 북한이 입만 열면 남조선 괴뢰도당에 핏대를 올리던 시절, 대한민국 고위층을 ‘괴뢰’ 고위층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가히 천지를 뒤흔드는 대실수였다.

인쇄되어 나온 신문을 훑어보던 이가 까무라칠 듯이 윤전기 스톱!을 부르짖었지만 이미 앞서 나온 신문들이 가판으로 60여 부, 그리고 하필이면 군 부대로 300여 부가 이미 배달된 뒤였다. 벌집을 쑤셔도 올 누드로 장수말벌 벌통을 헤집은 격이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 대응이 치타보다 빠른 것이 대한민국 당국의 유구한 전통. 정부는 정리부장 권오철과 공무국원 2명을 즉각 구속하고 주필 고재욱 등은 불구속 송치했다. 고의성 없는 실수라도 불경죄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리고 1955년 3월 17일 오후 4시 반 만장한 기자들 앞에 나타난 공보실장은 준엄한 어조로 동아일보에 이 불경죄의 책임을 묻는다.

“..... 사직 당국에서 엄밀한 조사에 있어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지만, 국론과 사상통일을 기하여 통일구족(統一求族)의 성업을 완수해야 할 엄숙한 때에, 국가원수를 괴뢰라고 표시하여 배포하였음은 고의의 유무와 수의 다수를 막론하고 방치할 수 없는 반민족적인 중대과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부득이 발간정지 처분의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덜렁대는 조판공의 자그마한 실수 하나가 ‘반민족적인 중대과오’로 격상되는 흥미로운 순간이지만 그로부터 두 달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던 동아일보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내리쳐지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43년이 흐른 어느 날,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국회의원 장을병이 여전히 북괴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국방부에게 이렇게 핀잔을 준 것이다. “옛날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던 당시에 소련의 괴뢰라는 뜻이었는데, 지금 그 본체인 소련은 없어져버렸어요.” 끈 떨어진 인형은 땅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저놈의 인형은 무슨 처키도 아니고 쌩쌩하게 살아 숨쉬는 판에 괴뢰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국방부는 버텼다. ‘괴뢰’라는 명칭이 사라진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순안 공항에 착륙하여 김정일의 영접을 받은 뒤의 일이었다. 2000년 6월30일 국방부의 문서에서, 그리고 2001년 8월11일 합동참모본부의 대내외용 문서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동아일보 조판공이 ‘괴뢰’자를 잘못 넣었다가 경을 쳤던 시대가 불과 10년 전인 2000년보다 더 살갑고 가까워 보이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한쪽에서는 상대방의 죽은 국가원수와 신임 국가원수를 잡아족치자고 표어를 붙이고, 또 한쪽에서는 수십만 명이 모여 그 규탄대회를 열며 사격 표적지에 상대방 대통령 얼굴을 그려 넣는, 우리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생들도 웃어댈 유치찬란의 장군아 멍군아를 실행하고 있는 요즘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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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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