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7월 지리산에서..이우재 (펌)

by 김민수 posted Oct 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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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진보신당 인천시당의 지도위원이신 이우재선배님이 200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창립20주년에 기고한 글입니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을 쉽고 간결하게 정리하신거같아 한번에 읽게되네요.

이정도 분량의 글이 2개정도 더 있는데요 반응이 좋으면 차례대로 올리겠습니다.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이 빠르기만하다.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하긴 이젠 내 모습도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에는 흰 서리가 앉은 지 오래니.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엄혹한 탄압에 신음하고 있던 이 땅의 민중에게 민통련의 출범은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 민통련에 나는 나의 젊음을 다 걸었다. 민통련의 발전이 곧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이요, 나의 발전이었다. 그런 민통련이 이런 저런 경로로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져 간 지 어언 십여 년, 나의 청춘과 그 치열했던 여러 동지들의 삶, 수많았던 기쁨과 분노와 좌절의 순간들도 기억 저 건너로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눈앞의 것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항상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던 맑고 고고했던 문익환 의장님, 당장 쓰러지실 것 같은 몸이셨으면서도 투쟁의 현장에서는 범보다도 더 무서웠던 계훈제 부의장님,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 사람들이 그랬으리라 생각될 만큼 호방한 기개를 자랑했던 백기완 부의장님, 이미 두 분은 이 세상에서 만나 뵐 길이 없어졌지만, 당시 그 분들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민통련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보다 더 훌륭한 많은 분들이 그 분들에 대한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말해 주리라 믿고 나는 나의 이야기나 해야겠다.

1986년 7월 내가 숨어 있었던 곳은 경상도 산청의 지리산 어느 골짜기였다. 86년 5월 3일 나는 도망은 꿈에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인천 시민회관 앞 사거리 시위 현장에 섰다. 사전에 민통련 본부, 지역단체들과 협의한 대로 그 날의 시위는 주안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철야농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철야농성이 목적이었던 만큼 주동자가 도망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운동권의 분열과 만연한 극좌맹동주의의 영향으로 철야농성은 이야기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시위는 거의 폭동의 수준으로 발전했다. 오후 5시 무렵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속에서 경찰이 시위 현장으로 진입해 들어왔고, 나는 장기표 선배와 함께 눈물을 머금고 시위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난장판 속에서 혼자 잡혀 들어간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또한 뒤이어 올 수사기관의 가혹한 고문을 감당할 자신도 솔직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생각에 지금 내가 잡혀 들어가면 평생 반병신으로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기약 없는 잠수함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처없이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기를 2개월,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갔다. TV에까지 방영되는 수배 사진, 식당이나 목욕탕 심지어 내가 즐겨 찾던 만화 가게에까지 붙어 있는 현상수배 포스터, 수배자를 숨겨주면 엄벌에 처한다는 경찰의 공갈 협박 등으로 어디를 가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오래 숨겨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한 일주일 있는 동안 내내 진수성찬에 술대접이었으나 받는 나의 입장에서는 일주일이 아니라 두 달 내내 술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들리는 친구의 부부싸움 소리, 친구 마누라의 근심스런 표정들, 그 모두가 고문이었다. 떠나자, 이 서울을 떠나자. 어디 한적한 곳에 가 몇 달 동안 휴양이나 하고 오자. 난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잠수함 생활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 내가 사람은 사람 속에 숨지, 산간벽지에 숨는 것이 아니라는 잠수함의 기본 철칙을 깬 것은 그만큼 몸도 마음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지리산의 한 골짜기. 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 이상 걸어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그곳에 자기 친구가 남의 집을 빌려 휴양 겸 공부하고 있다는 서울대 자연대 79학번 후배의 안내를 받아 찾아갔으나, 마침 79학번 친구들은 산에 더덕을 캐러 가서 없고 대신 집 주인만 있었다. 주인은 예상 밖으로 나보다 한 서너 살밖에 많아 보이지 않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마음씨 좋게 생긴 사람이었다. 주인을 만난 나는 술을 서너 잔 기울이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던 끝에 대놓고 도박을 감행했다. 시국 사건 관계로 수배 중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이곳에서 당분간 있고자 하는데 나를 받아주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것이다. 연배도 많지 않고 사람도 좋아 보여 대놓고 밝히는 것이 훗날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라는 직감에서였다. 최악의 경우라도 설마 고발하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도 있었고. 예상대로 주인은 순순히 승낙했고, 그날부터 나는 그곳에 미리 와 있던 서울대 79학번 친구들과 팔자에 없는 산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끔은 산에 더덕을 캐러 가기도 하고 가끔은 그 집 주인을 도와 산중 일을 하면서 저녁이면 막걸리도 한 잔씩 하는 그곳 생활은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마치 앞으로 닥칠 큰일을 예고라도 하듯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원래 그 집에는 집이 두 채 있었다. 집이라고 해야 산속의 그야말로 옛날 귀틀집 오두막이었지만, 산자락 위의 집에서는 세 살 된 딸과 이제 막 백일을 넘겨 늘 엄마 등에 매달려 있는 아들, 그리고 주인집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 집 안방에 달린 조그만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아랫집에서는 나와 진주가 자기 집인 79학번 후배들이 함께 자취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배들이 일 때문에 며칠 내려가 아랫집에 나 혼자 있는 동안 산중에 불운이 닥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주인집 개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 누가 꿩이나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독약을 뿌린 모양인데 그 약을 먹고 죽은 새를 그 집 개가 먹고서는 껑충껑충 뛰며 몇 번 울부짖더니 그냥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무슨 징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재수없이 개가 한 마리 죽은 것으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집 주인을 도와 내장은 모두 땅 속에 묻고 고기는 삶아 모처럼의 단백질로 영양섭취하고 있는 중에 이번에는 그 집 소가 죽었다. 당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사기극에 휘말려 전국 각지에서 소를 키우는 것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던 때라 그 집에서도 소 몇 마리를 방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제 고삐를 제가 밟고는 제 목을 제가 졸라 질식해 죽은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원래 소가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그 고기는 식용으로 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야 했다. 그러나 소 한 마리의 값이 예나 지금이나 장난이 아니고, 또 소가 무슨 병으로 죽은 것도 아닌 까닭에 죽은 소를 밀도축하기로 했다. 집 주인이 도끼와 칼을 들고 배를 가르고 각을 뜨는 동안 나는 주인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거들었다. 그런데 막상 소의 내장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꾸역꾸역 나오는 내장이 방 한 칸 양은 되어 보였다. 순간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내 뇌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옛 말에 안 좋은 일은 한 번이 아니라 연거푸 온다는 데 무언가 정말 안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소를 대강 도축하고서는 집주인이 돈이 될 만한 갈비와 다리 등을 경운기에 싣고 내려갔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데 그 다음날 부산에서 올라 온 주인의 말이 또 불길했다. 소를 팔러 부산까지 갔는데 부산에서 경찰에 걸렸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잘 수습하고 나왔는데 경찰서에 보니까 내 수배 포스터가 도처에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주인도 내가 수배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찾는 줄은 몰랐었다는 이야기다. 무언가 점점 예감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날 바로 전날 나는 주인을 도와 염소 움막을 짓고 있었다. 산중이라 겨울이면 날이 추워 염소들이 많이 얼어 죽는데 그것을 방지하려고 염소들이 추위를 피할 움막을 통나무와 흙을 이용해 귀틀집 모양으로 짓는 일이었다. 때는 7월 말이라 아무리 산중이지만 땀이 비 오 듯했다. 저녁 무렵 출출해지면서 술 생각이 간절했다. 집 주인을 살살 꼬셔서 그집 세 살 된 딸을 품에 안고서는 경운기 뒷자리에 앉아 걸어서는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덕산으로 내려갔다. 집 주인 역시 술을 좋아하는 터라 모처럼 돼지고기 안주에 얼큰히 취해서는 먹은 김에 안주거리 몇 가지 더 장만해 가지고 산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올라오는 길에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냇가를 건너는 다리목에 있던 청년들이 집 주인에게 공연히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수배자 신분이라 그런데는 상당히 예민했지만 술 한 잔 먹은 김에 뭐 별일 있겠느냐 생각하고 그냥 올라왔다. 그리고는 아랫집에서 운동화를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주인집 마루에 앉아 주인과 술을 몇 잔 더 했다. 그런데 그 술 몇 잔이 나를 구해 주었다. 평상시 같으면 술을 다 먹고는 아랫집으로 내려갔을 터이지만, 그 날은 술도 제법 먹었고, 또 내려가 봐야 내일 아침 혼자 밥해먹기도 귀찮고 하여 주인이 그냥 여기서 같이 자자는 말에 못이기는 척 눌러 앉았다.

문제의 그날 아침 나는 주인 아주머니의 숨가쁜 소리에 잠이 깼다. “삼촌 빨리 일어나 봐요, 삼촌 잡으러 왔나 봐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일어나긴 했으나 전날 먹은 술도 아직 덜 깼고 또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몰라 얼이 벙벙한 채로 그냥 앉아 있는 나에게 주인 아주머니가 문밖에서 말했다. 아랫집에 지금 검은 자가용이 두 대 섰는데 거기서 건장한 사람 대여섯이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윗집과 아랫집과의 거리는 대략 이백여 미터 윗집에서는 아랫집에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시간은 대략 여덟시가 조금 넘은 무렵이었다. 산중이라 바쁜 농사일도 없어 그때쯤 일어나 아침을 지으려고 하는데 자가용이 두 대 올라오더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중에 아주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그 사람들이 이리로 올라오고 있으니 나오지 말고 그냥 방 안에 그대로 있으라고 하였다. 집 주인도 깨어나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만화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주인이 나보고 그냥 이불 속에 누워 있으라고 하고 이불을 들어 내 위에 꾸겨 올려놓고는 팬티차림에 바지를 꿰고 나가면서 문을 활짝 열고서는 천천히 다시 문을 닫았다. 이불 속에 들어 있는 내 귀에 이런 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아랫집에 사는 사람 어디 갔냐? 주인의 모르겠다는 소리에 그들이 재차 물었다. 운동화도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어디 갔는지 모르냐? 평상시에 어디를 다니느냐? 글쎄 나는 그 사람 어디 갔는지 모른다. 가끔 아침마다 근처 산보도 하고 어떤 때는 산에 더덕 캐러가기도 하는데 산에 가면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온다. 산보는 어디로 주로 다니느냐? 그냥 이 근처 냇가나 산으로 바람 쐬러 가는데 어떤 때는 한 삼십분 만에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몇 시간씩 걸리는데 대중없다. 그런데 그 사람 왜 찾느냐? 당신 그 사람 누군지 아느냐? 글쎄 그냥 김씨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집을 빌려 주느냐? 나는 잘 모른다. 원래 저 집에는 진주에 사는 학생들이 고시 공부하러 와 있었는데 그 학생들하고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아 있으라고 했다. 그 학생들 어디 갔냐? 일이 있다고 진주에 내려갔다. 한동안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것 같았다. 중간 중간 고성의 적개심에 가득 찬 빨갱이 새끼들 하는 소리도 들렸다.

얼마 후 문이 다시 열리고 주인이 들어왔다. 주인이 나를 보고 물었다. 김씨 이제 어떻게 할 거냐?(내가 수배자인 관계로 그는 항상 나를 그냥 김씨라고 불렀다.) 대책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디로 갔냐? 당신 찾아본다고 요 근처 둘러보러 갔다.

세상에! 꼼짝없이 잡혔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7월 한 여름의 햇빛 속에 서면 어두운 곳이 잘 안 보이는 법이다. 주인이 바지를 입으면서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들이 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7월의 밝은 햇볕 속에서 어두운 방 안이 잘 보일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 방은 주인 내외가 자는 안방이었다. 그 전날 주인과 내가 밤늦게까지 안방에 딸린 마루에서 술을 마시자 아주머니가 우리 보고 안방에서 자라고 하고 당신은 곁방으로 건너간 것이다. 방금 자다가 빠져 나온 듯 이불이 꾸겨져 있는 안방과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이 태연하게 바지를 입으며 문을 열고 나오는 주인의 모습에서 그들은 바로 그 방 안 이불 속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내가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나? 잡히면 모든 것이 끝장인데. 나도 고생이지만 이 험한 산중에서 고생 고생하며 살아가는 이 집 주인 내외가 받아야 할 고초를 생각하면 끔찍했다. 주인 아저씨가 구속되면 이 험한 산중에서 아주머니는 저 어린 것들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생각할수록 답이 안 나왔다. 그렇다고 탈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길은 외줄기. 탈출할 길목은 이미 봉쇄되었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할 수는 없는 노릇. 우선 이 안방을 벗어나야 했다. 일단 생각 좀 합시다. 우선 이 안방은 벗어나야겠으니 그 사람들 오나 망 좀 봐 주세요. 그리고 나는 옷을 입고 안방에서 나와 그 집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가까운 산자락에 숨어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올라온다고 하여 다급한 김에 부엌 문틈에 숨은 것이다. 7월의 햇살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주위를 둘러보고 온 그들은 주인에게 “당신 그 사람 누구인지 알아 한번 혼나봐야 정신차리겠구만. 빨갱이새끼들.”하면서 화가 나서 씩씩대며 주인 내외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 안을 둘러보려고 하지 않았다.

천우신조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만일 내가 내 신분을 숨겼더라면, 내가 쫓기는 사람인줄 주인 내외가 몰랐더라면, 주인 아주머니가 나에게 그들이 온 것을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산중에서 같이 일하며 개가 죽고 소가 죽고 하는 동안 이러저러하게 정이 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감싸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가 죽고 소가 죽고 한 것이 이 난리를 암시한 전조였는지 모르지만 화가 복으로 바뀔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도망가자, 어떻게 하던 도망가자, 가다가 잡히더라도 일단 이 자리는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저 사람들하고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잡히더라도 일단 여기는 벗어나서 잡히자. 방법은 집 뒤로 장벽처럼 솟아 있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아무런 길도 없는 저 산을 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 산을 넘자.

산을 넘자면 우선 이집에서 빠져나와 산자락으로 붙어야 했다. 주인 아저씨가 망을 보는 사이에 집 뒤의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산 속에 들어간 이상 당분간은 안심이었다. 이 깊은 산중에서 저들이 개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나를 찾아낼 방법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산을 타지. 슬리퍼 차림으로 저 험한 산을 오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내 운동화는 아랫집에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가져오지. 또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무슨 기력으로 산을 넘지. 그리고 산을 넘으면 어디로 가지. 주인아저씨가 말하길 집 뒤의 산을 넘으면 중산리라고 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진주로 빠져 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화는 가져오기 어렵다고 했다. 저들이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데 만일 운동화가 없어진 줄 알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저씨는 대신 자신의 헌 신발을 몰래 가져올 테니 그걸 신으라고 했다. 그리고 먹을 것은 자기가 집에 뭐 먹을 것이 있나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면 준비 끝. 그런데 아참 여기를 빠져 나간다고 해도 돈 한푼 없이 어떻게 움직이지 난감했다. 그런데 내 바지에 돈이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어제 덕산에 술 먹으러 가서 술값 내고 남은 몇 천원이 바지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아저씨가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가 가져온 운동화는 너덜너덜한데다 주먹 하나는 족히 들어갈 만큼 컸다. 그래도 슬리퍼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아직 밥을 안 해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대신 그 집 젖먹이가 먹는 분유를 한통 진하게 타 가지고 왔다. 똥 된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것이라도 먹어 두는 것이 안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니. 자 이제 준비 끝. 그동안 보살펴 주고 또 오늘 이 난리 속에서도 끝까지 나를 감싸 준 것에 대해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인사하고 난 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한 채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산죽과 덤불로 꽉 찬 숲을 뚫고 그냥 위로만 올라갔다. 산죽에 걸려 안경은 자꾸 벗겨지고 운동화가 큰 탓에 발가락이 점점 아파 왔지만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날이 어둡기 전에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러기를 한참, 무심코 바위에 발을 딛으려는 데 이런 큼직한 살모사 한 마리가 바위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 아닌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이 깊은 산중에서 뱀에 물리면 속수무책으로 죽는 수밖에 없었다. 내 시체는 산짐승의 밥이 되거나 아니면 아마 이 산속에 웬 까마귀가 저렇게 몰려 있나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서나 찾아지겠지. 발밑을 살피면서 올라가기를 한 삼십분쯤 했을까 바위 위에서 살모사 한 마리가 또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체되건 말건 조심조심 살피고 살피면서 산을 올라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산 능선에 오르고 나니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 밑으로 천왕봉과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려가기를 또 한참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들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내려가니 머루밭이 나타나고 또 내려가니 길이 나타났다. 일단 산을 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 하나 남았다. 지리산 남동부 지역은 모든 길이 덕산으로 통했다. 만일 덕산에 포위망이 쳐져 있다면 빠져 나갈 길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산을 넘어 전라도 쪽으로 갈 수도 없는 일.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중산리에서 탄 버스 안은 등산객들로 가득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등산객들의 배낭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 위까지 올라오도록 배낭을 얹은 후 머리를 푹 숙인 채 자는 척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덕산에서 아무런 검문 검색도 없다. 문득 피로가 온몸으로 젖어들었다. 그리고 진주에 도착하니 어느덧 6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내가 그곳을 다시 찾은 것은 2년이 지난 88년 9월이었다. 88년 3월, 20여 개월의 잠수함 생활 끝에 결국 잡힌 나는 이미 상황이 다 종료된 일이라 100일의 감옥살이 끝에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민통련 관계일로 부산에 내려 갈 기회를 이용하여 그 집에 들렀다. 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 가량 산길을 걸어가면서 그 이후 혹시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이 반갑게 뛰어나와 맞이하는 것 아닌가? 그날 나를 덮쳤던 그들은 나를 잡는 데 실패하자 모든 일을 없었던 일로 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나에게는 한 분의 형님과 형수님, 두 명의 조카가 새로 생겼다. 그리고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그때 세 살짜리 여자애는 어느덧 대학 졸업반이 되었고, 엄마 등에 매달려 있던 사내애는 올해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이 되겠다고 하고 있다. (200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창립 20주년 기념문집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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