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아픈 이야기 /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며 대의원들께 한 당원으로서 드리는 글(중앙당게 펌)
어제, 오늘은 제가 정당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살점 중 어디를 떼어낼지 선택을 강요 당하는 사람처럼 답답하고 괴롭기만 했습니다. 다른 당원들도 다 같은 심정이실 겁니다. 우리를 이런 선택으로 내몬 이 상황이 증오스러울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만, 저는 이른바 강경 독자파(저 나름으로는 ‘좌-통합파’라 달리 불러 보기도 하고 ‘녹색사회당파’를 자처하기도 했지만)의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목요일 밤에 있었던 진보신당하나로모임 주최의 회의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당대회 합의안을 이끌어내려는 진보신당하나로모임의 노력이 성과를 내기를 진심으로 바랐었습니다. 당대회에 임하는 대의원 동지들의 선택과 결정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저 같은 사람의 입장을 조금 후퇴시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많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이제 와서 또 다시 그러한 한시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에 회의하거나 반대하셨습니다. 저는 당대회 합의안 마련에 미련을 지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런 반대 의견에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동지들의 분노와 좌절, 지난 3년에 대한 회한과 그에 비례한 결의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결정을 8월로 미뤄보자는 설득은 많은 독자파 성향 당원들이 던지는 단 하나의 물음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이제까지 이 당을 청산하려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타협을 거듭해왔다. 그러고 나서 결과가 이것이다. 이제 또 다시 무슨 타협이며 그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지방선거 이후부터 1년간 기억나는 것은 진보신당의 법인 청산을 주장하는 분들을 어떻게든 당으로 되돌리고자 이 분들과 끊임없이 타협했던 것뿐입니다.
2010년 임시당대회에서 ‘당발전전략’을 결정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모호하면서도 위험한 목표 자체를 채택할 수 없다고 할 때, “나부터도 과거 민주노동당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당대표의 말을 믿어보자며 타협했었습니다.
새 당대표가 민주노동당 등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공감이 적은 세력들과 함께 연석회의를 갖겠다고 할 때에도 연석회의를 기술적인 협상장이 아니라 공론의 장으로 만든다는 전제 아래 타협했었습니다.
2011년 정기당대회에서 ‘새 진보정당 건설 종합실천계획’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도 그보다는 새 진보정당 건설의 원칙을 좀 더 분명히 하는 수준에서 수정하자며 타협했었습니다.
5월 중순에 연석회의 논의가 이미 진보신당, 사회당에 대한 여타 단체들의 포위 구도로 고착되어갈 때에도 전국위원회에서 협상 중단이 아니라 계속 추진 쪽으로 결정하며 타협했었습니다.
타협하고 또 타협했었습니다. 그간 게시판에서 독자파 성향의 당원들의 날선 글들이 자주 올라와서 마치 분위기를 독자파들이 주도한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오히려 독자파의 끊임없는 타협에 대한 독자 성향 당원들의 불만의 표출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굴하게라도 진보신당의 틀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아니, 지난 1년간뿐만 아니라 진보신당 창당 때부터 우리는 대중정당의 위상을 유지해야 하다는 강박 아래 명망가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양보하고 그들과 타협해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지난 3년간 진보신당 역사의 큰 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끝이 무엇입니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당대표와 새진추 위원장이 들고 온 기괴한 합의문이고,
합의문 승인은 의결정족수 1/2이라며 당의 법인 청산에 대한 절차적 기준조차 견강부회하는 한때의 지도자, 동지들의 모습이고,
당대회에서 어떤 결정이 나더라도 이 당에 남아 따르겠냐는 당원들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전 당대표들의 모습입니다.
1년간의 지겹고 낭비적인 정치 과정이 도달한 이 당 청산극의 결말 앞에서 저는 이미 고뇌와 번민 끝에 결의를 다진 대의원들, 당원들을 설득할 어떤 명분도, 자신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그들 중의 한 명이 되어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작은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합의문 부결이 과거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서 비롯되는 결단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1년과 같은 구시대 정치의 집약판을 떨쳐내고 이제 비로소 ‘진보의 재구성’을 제대로 펼쳐낼 미래를 여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망의 마침표이고 희망의 단호한 선택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광란극은 시한부입니다. 이 국면은 2012년 대선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약 없이 광야를 헤매자는 결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이 빈정대는 것처럼 ‘등대정당’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현실정치의 지분 하나를 이유로 2011년-2012년의 정치적 격랑기에 이합집산을 거듭하려는 흐름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이 시기에 일단 우리의 기지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십여 개월 동안 분리도 있을 테지만, (재)합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지는 이 혼란 속에서 유일한 중심 기둥 역할을 할 것입니다.
둘째,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새로운 도약을 재촉하는 가장 효과적인 자극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낡음을 입증하려고 혈안이 된 지도자들이 남기고 간 빈 자리는 그냥 빈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이제 그 자리가 당협위원장이나 지방의원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군으로 채워져야 하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항상 명망가 정치인의 눈높이에 맞추느라 우리 스스로 수줍어하며 미뤄왔던 ‘진보의 재구성’의 과제들도 이제 (뒤늦게나마) 보다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여성, 생태의 가치를 전면화한 새 진보정당”이라는 2010년 임시당대회 결정의 가장 충실한 구현체로서 <풀뿌리 녹색><신좌파(신진보)>당(물론 당명이 아니라 당의 성격!)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현실정치 여건 역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2>, 즉 <종북주의 없는, 민주노총 지원 없는 민주노동당>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두 번의 전국 선거에서 3% 안팎의 정당 투표를 받았습니다. 만약 이제부터 단순한 <진보정당 2>가 아니라 <풀뿌리 녹색>정당, <불안정 노동자>정당의 성격을 분명히 발전시킨다면 정당 지지 확대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1990년대나 2000년대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명망가 정치인들이 알고 있는 만큼은 현실정치의 생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2012년 총선을 슬기롭게 경과할 가장 탄탄한 밑천입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이 있습니다. 저는 이때의 진보독자후보는, 어찌 됐든, ‘우리 당’의 후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앞으로 2년간을 우리의 성장 수준에 딱 맞게 대처하면서 2014년 지방선거를 진정한 첫 승부의 계기로 만들어가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이른바 ‘2012년 총선 20석 확보’의 가능성보다 결코 낮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일 당대회의 결정이 지난 1년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마무리이자 6월 27일 이후의 미래에 대한 가장 의연한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진보정치운동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당대회로 기억되는 당대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바람과 다짐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그리고 대의원, 당원 여러분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끄적여 봤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