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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지방선거를 거치며 인천시당의 지도위원 역할을 하시느라 지역의 많은분들과 소원한 관계가 되셨으리라 짐작하는데 이 혼돈의 시기에 이우재 선배님의 영원한 스승이신 양민호선배님과의 관계는 어떨까? 매우 궁금합니다.^^

 

양민호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나는 동양사학과에 진학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관이 되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고 동양사학과에 가기로 했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이 양민호와의 만남으로 인해 백팔십도 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법관은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그럭저럭 밥은 먹으며 중국에 관한 공부나 하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민호와의 만남으로 인해 내가 법정을 들락날락거리며 살게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것도 근엄한 법관의 복장이 아니라 푸른 죄수복을 걸친 채 법정에 서게 될 줄이야.

처음부터 양민호는 나를 찍어놓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왔던 게 분명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에게 양민호는 월남전이 어떻고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다는 등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싸며 접근해 왔다. 그 잘난 지하서클에서 알량한 책 몇 줄 읽은 것을 가지고 무슨 세상의 대단한 진리나 발견한 것처럼 거창하게 지껄여대는 양민호에게 한심스럽게도 나는 아무런 논리적 반박도 가하지 못하고 점점 세뇌되어 갔다. 십몇 년도 채 안 돼 양민호가 당시 지껄였던 모든 것이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말았지만 당시 나는 양민호의 가르침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능의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무지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여름, 나는 양민호가 가르쳐 준 대로 나라의 민주화와 전 세계 피압박 민족과 피압박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대장정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대학생으로서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무슨 대단한 순교자나 되는 것처럼 자못 비장한 각오로, 누구도 제 정신이라면 꿈에서라도 전혀 가려고 하지 않는 그 길을 향해 나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스승 양민호는 아쉽게도 그런 나와 동행하지 않았다. 무명소졸이었던 내가 어찌 그가 김수천 등과 함께 학내 최고 사령탑의 멤버이며 2학기 데모의 조직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저 서운하고 야속하기만 했던 것이 당시 나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양민호와 나의 질긴 인연을 계속 붙잡아 두었다. 6월의 데모에서 내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다음 데모를 준비하였고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민호를 반드시 동행하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램이 통했던지, 사실은 원래 그렇게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9월의 데모에서 양민호는 나와 행동을 같이했다. 그리고 정말 불행하게도 그와 나 모두 도망을 치는 데 성공하였다.

양민호와 나는 외견상으로는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다. 그나 나나 키로 따지면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을 제외한다면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당당하게 맨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그보다 한 2cm정도 더 크지만 그 정도는 도토리 키재기로 중국말로 하면 차부두어(差不多)였다. 그리고 용모도 어떠한 세상이 오더라도 결코 영화배우는 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물론 내가 그보다 조금 더 지적이고 샤프하게 새겼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아마 그게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물론 그는 시골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이었고, 나는 도시의 궁상맞은 실업자의 아들이었지만 소득 수준으로 말하면 역시 중국말로 차부두어였다. 게다가 물론 내가 그보다 지능 수준이나 학업 성적이 훨씬 우수했지만 그도 역시 동네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격적으로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그는 좀 능글거리는 스타일이었다. 또 내가 술을 좋아하는 데 반해 그는 술 한 잔만 먹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힘들어했다. 내가 골초인 데 반해 그는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서로 성격적으로 판이한 두 사람이 같이 도망을 다니면서 그와 나는 여러 군데서 충돌했다. 내가 술 먹자고 하면 그는 밥 먹자고 했고, 내가 술 마시며 놀자고 하면 그는 삼봉이나 치면서 놀자고 했다. 나는 그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도망다니는 처지에 내 돈이 네 돈이고 네 돈이 내 돈인데 돈 따먹기 화투를 칠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지금의 고스톱처럼 흥미진진한 게임이 아니라 재미도 없는 전라도 삼봉을, 그와 함께 도망다니면서 우리는 내내 티격태격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덧 추석이 다가왔다. 도망자 신세에 제일 처량할 때가 명절을 맞을 때다. 가족 생각도 나고 남들이 희희낙락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온갖 상념이 다 떠오르는 법이다. 그와 나는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무주 구천동을 거쳐 대둔산, 계룡산 일대를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그때 나는 정말 너무도 세상 물정을 몰랐다. 세상에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양민호와 같이 여행을 하기로 하다니. 어찌 되었든 우리는 갑갑한 서울을 벗어나 무주로 향했다.

그런데 여행길에서 양민호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도대체 나의 스승 양민호는 자기 주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대단한 얼굴에 왜 그리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지. 예전에는 고속버스에 안내양이 있었다. 아, 그런데 이 양민호 선수가 왜 그리 안내양을 귀찮게 하는지, 물 갖다 달라, 뭐 갖다 달라하며 한 10분 간격으로 한 번씩 부르며 고향이 어디냐는 등 올 때마다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하도 불러대니까 나중에는 안내양이 듣고도 못들은 척 대꾸도 안하는 것이었다. 같이 앉아 있는 나는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더니 양민호가 결국 한 건을 올렸다. 계룡산을 넘어가는 데 그 호젓한 산길에서 앞에 가던 아가씨 두 명을 꼬신 것이다. 우리도 두 명, 그 쪽도 두 명,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아가씨들도 명절 때 고향에 가지 않고 산행에 나선 것이다. 쓸쓸한 김에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산행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저녁에 도착한 공주 마곡사에서 아가씨들이 맛있게 만들어 준 카레로 저녁까지 한턱 얻어먹고. 그러나 양민호의 실력으로는 그게 한계였다. 하기야 그 얼굴로 더 이상의 진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꿈같은 상상은 몽상으로 끝나고 말았고, 다음날 그 아가씨들로부터 아침까지 얻어먹고는 서로 각각 자기의 길로 갔다.

그런데 대둔산에서 일이 터졌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대둔산의 그 유명한 구름다리를 못 올라가 쩔쩔매고 있는데 그것을 본 양민호가 나를 살살 약올린 것이다. 은근히 꼬라지가 난 나는 산을 내려가자마자 가게에서 술을 시켜 혼자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어차피 양민호는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 마시고 있는데 양민호가 다가오더니 안주발을 세우기 시작했다. 양민호의 안주 솜씨는 우리 과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학생 처지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그저 찌개하나로 국물이나 마시며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어느새 양민호가 안주를 모두 먹어치우곤 했던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술 몇 잔 먹고 있는 사이에 양민호가 안주를 모두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있던 내가 양민호에게 싫은 소리를 해 댔고 우리는 결국 충돌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끝나고 말았다.

그 해 10월 10일과 11일 양민호는 나와 결국 나란히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양민호가 나의 스승이라고 나보다 하루 먼저 잡혀 주었다. 스승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나보다 매도 한 대 더 맞고 징역도 하루라도 더 많이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 자명한 진리를 이 나라의 판사들은 알지 못했다. 양민호가 나의 스승이고, 서울대 학생운동의 사령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는 그저 혈기많은 일개 무명소졸에 불과했는데도 내가 양민호보다 데모를 한 번 더 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양민호보다 징역 1년을 더 얹어 준 것이다. 나는 그때 이 나라 사법부의 수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이왕 버린 몸,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냥 그 길로 일로 매진 했다. 그러나 나의 스승 양민호는 역시 나보다 훨씬 지혜로웠다. 그는 이 길이 별 볼일 없는 길인 줄 진작에 눈치채고 슬며시 길을 비켜 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청와대도 가 보고 지금은 잘 나가는 국영기업체의 감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내 몸은 평생 그 흔한 근로소득세 한번 내보지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시 스승은 제자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한 단계 높은 모양이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다. 나는 이 세상을 끝마치는 날까지 양민호를 스승 대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승이 제자에게 절을 하게 되는 그런 불상사는 결코 없도록 할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절을 해야지, 스승이 제자에게 절을 하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하여 스승님의 영정을 내가 모셔야지, 스승이 제자인 나의 영정을 모셔서야 되겠는가? 우리 스승님이 세상 가시는 길을 내가 배웅해 드려야지, 스승이 나를 배웅하게 만들어서야 어디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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