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진보는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선 ‘사랑’이다. ‘타인의 정서’에 대한 이해다. 세상에서 오직 차별만이 차별당하고 억압만이 억압당하며 소외만이 소외되기를 원한다.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잘 참지 못하는 내가 정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그다지 잘 맞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내가 속한 당을 향해서도 언제 비판을 가할지 모른다. 그래서 2008년에도 잠깐 고민을 했지만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욕하고 싶어서”. 그러던 내가 지난 연말 마음을 정했고 결국 올 초에 진보신당 당원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우경화된 정치의식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진보신당의 존재는 왼쪽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얹어주는 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진보신당이 위기에 놓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이 곳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입당,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몇 시간 후에 재외국민 투표를 하러 간다.   


내게 있어 진보는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선 ‘사랑’이다. ‘타인의 정서’에 대한 이해다. 그러나 실은 인간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마 사랑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내 자신을 회의하게 된다. 문명의 성은 높게 쌓았으나 우리는 정말 왜 사랑하지 못할까. 고도의 문명인은 정말 많으나 ‘타인의 정서’에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를 만나기 어렵다. 그렇게 사랑 없이 배운 자들이 설쳐댈 때 세상은 진보하기는커녕 오히려 파국에 이를 가능성이 더 높다. 똑똑한 한 명이 만인을 먹여 살린다구? 웃기는 소리! 사랑할 줄 모르는 똑똑한 자는 만인을 짓밟고 혼자 영광의 빛을 본다. 타인의 정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삶의 터전을 함부로 빼앗고 단지 ‘돈’으로 양심을 씻는 행동을 하기는 어렵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인격의 무게’는 같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비인격적 삶을 그리 쉽게 외면할 수 없다. 허나 우리는 갈수록 무디어지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인간의 껍데기를 사랑한다. 하여 국격은 소중하되 인격은 짓밟는다. 아! 늘 감수성 결핍의 이 사회가 슬프다.


이윤과 성장의 가치를 칭송하는 환경에서는 지극히 그럴 수 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은 세계적으로 추모해도 나날이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사회다. 노동자들은 소모품 취급 받는다. 노동자가 인격적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품을 구매하여 ‘고객님’이 될 때다. 그리고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고 파괴를 통해 지배하고 인간은 경쟁의 대상으로 삼거나 상품으로 만든다. ‘자연’이 가장 큰 스승이며 ‘인간’이 늘 하염없이 그리운 존재인 나는 다른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이 물질 사회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생명의 소리는 대체 어디로 갔나. 그러나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집단의 최면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며 우리는 모두 이 올가미 속에서 버둥거리는 사이보그다. 그러니 세상은 따라가기 버겁게 변화하는데 나는 아직도 팔딱거리는 아날로그 심장을 가지고 있어 우울 속에 정체되어 있다.


나는 인격적 관계의 회복을 꿈꾼다. 종대가 아닌 횡대의 사회를 꿈꾼다. 더 많이 소유하는 사회가 아니라 더 자유롭게 존재하는 사회를 꿈꾼다. ‘기부 천사’가 굳이 필요 없이 애초에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꾼다. ‘스펙’이니 ‘인적자원’이니 하는 말로 내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나 자원이라는 세뇌를 당하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문화도 ‘산업’으로만 칭송 받는 세상이 아니기를 꿈꾼다. 가끔은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대통령을 상상한다. 9시 뉴스에는 중후한 여성 앵커가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사회라면 좋겠다.(이렇게 소박할 수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목욕탕에서 쫓겨나는 사례를 뉴스에서 보고 경악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이런 별 것도 아닌 걸 다 꿈 꿔야 하다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민 여성들, 성폭력으로부터 더욱 보호받지 못하는 장애 여성들이 충분히 목소리 내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에서 오직 차별만이 차별당하고 억압만이 억압당하며 소외만이 소외되기를 원한다. 





누군가에게는 진보신당이 꿈꾸는 세상은 그야말로 꿈 같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재벌개혁, 그게 가능하겠어? 비정규직 없는 세상? 이윤보다 행복을? 이 자본주의에서 이윤 없이 어떻게 행복해? 허나 애초에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가진 라이트 형제의 맹랑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비행기를 조금 더 늦게 만났을 것이다. 상식을 넘은 발칙한 상상이 현실의 한계를 넘게 해준다. 그래서 다양한 미학적 감수성의 회복이 우리를 이 단세포 물질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며 이 세상에 추동력을 줄 것이라는 ‘꿈 같은’ 믿음으로 견딘다. 모든 ‘교환 가치’로부터 나를 구원하기. 그렇게 ‘현실적 가능성’을 뛰어넘는 상상을 펼쳐 보이는 정당이 있어야 우리 현실은 비로소 꿈틀거린다. 그 가능성 안에 안주하는 정치만 있다면 결국에는 고여서 썩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굳이 ‘꿈 같은’ 정당과 하늘을 나는 몽상이나 하자는 것을 권유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한 순간에 와르르 재벌개혁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스머프 동산이라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 일상 속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바꿔나갈 수 있다. 청소노동자의 휴게실과 점심 제공이라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인간적인 공약조차 실천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라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방방곡곡 토목질에 툭하면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팔아먹으며 성과식 사업을 이어가면서도 정작 ‘인간’이 쉴 공간에 대해서는 생각할 줄 모르는 이 비인격적 사고를 반성하고 바꿔야 할 것이 아닌가. 인간이 인격적 대우 받기를 원하는 것이 꿈이 되어야 하는 사회라니…… 이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결코 몽상이 아니며 우리 살갗에 닿는 현실적 가치의 추구다. 인간이 쉬고, 인간이 밥 먹는 세상.


“그저 정규직이 부러워” 혹은 “그래도 당신은 정규직이잖아”라고 말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노동자들 사이에도 도랑을 파는 이 나쁜 현실에서는 나쁘게 살아야 당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보신당이 ‘꿈 같은’ 소리하는 정당이겠지만, 정작 이 현실 속에서 허덕거리는 이들에게 진보신당의 강령은 너무나도 현실이다. 출세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호의호식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맘 편히 밥 먹고 억압 없이 살자는 것이다. 그게 그리 대단한 꿈일까.


브라질의 전대통령 룰라를 보며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허나 부러워만 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룰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룰라’를 알아보는 눈과 수 많은 ‘룰라’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말고 각자 룰라가 되어야 한다.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 생각이 진짜 불가능을 이끈다. 자본주의의 돼지로 살기 싫다. 썩은 고기 찾아 다니는 도시의 하이에나로 살기도 싫다. 조금 불편하고 덜 가져도 좋으니, 비참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소외된 곳에 시선을 두는 정당만큼은 꼭 욕심 내어 가져야겠다. 이것은 이 물질 사회에서 ‘인격적’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이며 발악이다. / gala


이라영은 프랑스에 머물며 예술사회학 공부를 하고 가끔 이런 저런 글을 씁니다.

 

[ 이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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