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길에 홍세화 대표님의 '나는 왜 투표하는가'에 대한 진보신당 당원의 에세이를 구한다는 트윗을 보았다. 꼭 이에 응해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왜 투표하는지에 대해 이생각 저생각하다보니 글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써둔다. (에세이 형식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30대 후반의 직장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다. 직장 중에서는 급여나 회사 규모, 안정성 뭘로 봐도 아마 별로 안좋은 축에 속할 거다. (어쩌면 남들도 나처럼 못사는 것으로 보아 보통 수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신당 당원이다.

‘나는 왜 투표하는가?’ 출근길에 자리에 앉아 오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서서 왔으면 이 글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질문은 무슨 의미지?”였다. 설마 ‘왜 투표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인가? 그렇다면 의회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 에 대해 정당 운동의 필요성을 말하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별로 문제삼는 분도 없고 이 건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진보신당의 역사 때문일 텐데, 또 다른 역사에서 비롯된 질문이 연이어 일어난다.


‘진보신당 당원은 왜 진보신당에 투표를 하느냐?’ 통상적으로 어떤 당 당원이 그 당을 찍는 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에서는 필요했었다. 진보를 위해 다른 당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과 진보신당 당원은 진보신당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던 때가 있었다. 참 희한한 논란이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그런 토론을 벌일 사람이 별로 없다. 불행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각자 자신이 찍을 수 있는 당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진보신당에 남았지만, 다른 길을 택하신 분들도 인간적으로는 존중한다.)


하여간 진보신당원은 아주 정상적인 질문을 보고도 복잡한 기억을 되새겨야 하는 약간은 불쌍한(ㅜ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왜 진보신당에 투표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내 삶의 조건은 아직은 나쁘지 않지만 썩 좋은 편도 아니다. 아직은 먹고 살만하지만 앞을 생각하면 답이 없다. 애들은 또 어떻게 키워야할지.. 아이들이 좀더 커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 기득권을 향유하거나, 세상이 바뀌는 수밖에 없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사업 감각이 부족한 나로서는 노동자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노동자가 돈을 많이 벌기란 로또 맞는 것보다 힘들지 않을까? (애를 낳기 전에는 그래도 저축을 좀 했는데 ...)


그러니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은 로또를 맞거나 vs 세상이 바뀌거나 둘 중 하나인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세상이 바뀌는 쪽이다. (로또에게 표를 줄 일이 없으니 어느 쪽이든 세상이 바뀌는 걸 바라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적어도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정당에 투표를 하는 것이 제일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신당의 당원이고, 진보신당에 투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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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문제적인 현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른 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신당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고, 세상에 영향을 줄 힘을 가진 정당은 다른 당이라고...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당들이 세상을 바꿀 힘은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바꿀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당들은 FTA를 시작했거나 마무리했고, 비정규직법안을 개악하거나 개악된 법을 유지하고 있고, 삼성의 정부였거나 재벌의 정부이다.


세상에 영향을 줄만큼 큰 정당들이 이런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은 정말 현실적이기는 하나, 이건 나와 대다수 국민이 곤궁한 삶에 처하게 되는 원인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다시 반론이 온다. 좋은 FTA와 나쁜 FTA의 차이, 고뇌에 찬 쌍용차 매각 명령과 철면피같은 쌍용차 구조 조정의 차이, 동북아 균형자로서 발언권을 의식한 자주적 파병 명령과 굴종적 한미동맹을 위한 파병 찬성의 차이 같은 것, 또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추리 폭력 진압과 안보장사를 위한 구럼비 폭력 진압의 차이......


물론 전문가적 식견에서 살펴보면 차이가 있기는 할 것이다. 완전히 똑같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사장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구조조정을 하건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시시덕거리면서 구조조정을 하건 내 목이 날아가는 건 매 한가지. 내가 그 차이를 심각히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조금은 낫다는 이들이 아무리 나를 위해 고뇌하고 배려하는 척 하더라도, 결정의 순간이 오면 더 나쁘다는 놈들과 같은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방증이 아닐지.

다시, 왜 진보신당에 투표하는가?


기러기가 그리는 V자는 그 무리의 기러기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V자를 그리며 그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날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기러기들은 단순히 시야를 확보하고 공기 저항을 줄이며, 서로 비행에 방해가 안될 만큼 거리를 둔다는 단순한 규칙을 따라 날 뿐이라고 한다.


내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는 데 무슨 거창한 식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 개혁을 하기 위해 내가 친이·친박계의 갈등, 친노의 고뇌에 찬 타협이나 합리적 보수의 상대적 우위라거나 이들의 역학 관계나, 심지어 어떤 정치인 개개인의 순결한 심성과 눈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 등등 이런 걸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단지 사람은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아주 간단한 규칙,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에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론. “우리 삶을 바꾸자.” 이걸 말하는 당에 투표하는 게 현실적이다. 그 당이 진보신당이다.

PS1.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김순자 님이 결정되었다. 김순자 님은 아마 고도의 정치력 같은 건 없으시리라 생각한다. 다수당의 역학 관계 속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정치 지형을 어쩌고 ... 이런 걸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4년 동안 국민의 세금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정책 대안이 개발되고, 그것이 국회에서 단말마의 비명으로나마 외쳐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진보신당을 찍을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PS2. 노름도 안하고 사치도 안하는 맞벌이 부부가 애 둘을 키우는 데 그리 많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원하는 것, 총장 한 명의 방이 20평인데 수십 명의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 구석 말고 쉴 수 있는 방 한 칸 달라는 것, 라면 한 개가 3500원인데 대학 졸업해서 88만원 보다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 겨우 200km 거리에 있는 원전이 수시로 고장나는 데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


이게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43년 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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