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실례를 무릅쓰고, 故 이재영 전 정책위의장을 ‘이재영’이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도록 하겠다.

추억 

초창기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사람 치고 이재영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마 그의 죽음에 대한 새삼스러운 추모가 넘쳐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그런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평생을 진보정당운동에 바쳤다는 것, 어느 시기에든 민주·평화·개혁 세력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진보정당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는 것, 그의 존재가 다른 활동가들에게는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내가 그를 알게 됐을 때 그는 이미 ‘당권파’였다. 2002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권 대표’, ‘노 총장’에 불만을 품은 몇 명의 민주노동당원들이 모여 술을 먹는 자리에 중앙당 관료인 이재영이 잔뜩 취한 채로 왔다. 나는 고작 스무살이었다. 이런 불만, 저런 불만을 늘어놓는 중에도 이재영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내가 자신을 필명 ‘이상한 모자’로 소개하자 이재영은 게시판에서 글을 본 일이 있다며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요즘은 뭐 해요?”

당시 나는 돈이 없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생산직 노동자 일을 하고 있었다.

“LCD모니터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을 한참 먹고 나서 그는 다시 말을 붙였다.

“비디오 공장에 다닌다고 그랬죠? 그 비디오 테이프라는 것을 만들 때에는...”

“아뇨, LCD모니터 공장에 다닙니다.”

이재영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그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브라운관 공장에 다닌다고 했죠? 원래 브라운관이라는 게...”

“아뇨, LCD모니터 공장에 다닙니다.”

LCD모니터가 당시의 최신 기술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운동권들의 환경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의 그런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그런 이해를 넘어서 ‘이재영이라는 사람은 좀 고지식한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최신 유행에 민감하지는 않지만 아날로그적인 지식을 뇌 한 켠에 한가득 쌓아놓은 사람들 말이다. 조금 철이 지난 백과사전 같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보통 그런 사람들은 ‘진짜배기’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이념적이었던 사람 

이후 이재영과 술을 먹을 일은 없었다. 주대환 당시 정책위의장과 길을 걷는 그와 마주치면 “아, 이상한 모자 반가워! 잘 지내지?” 하는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보통 이재영과의 인연을 얘기하면서 ‘사실 나는 이재영을 잘 모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떠나간 위대한 사람을 추억할 꺼리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적인 인연이야 어떻든 그의 글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영감을 샘솟게 해주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강조하고 싶다.

그의 글은 언제나 구체적이었다. 그저 당위를 설명할 때에도 일방적으로 우기는 법이 없었다. 진보정당이 독자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남들이 그저 감정을 소모할 때 그는 외국의 풍부한 사례를 들거나 치밀한 논리를 들이밀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어떻고 영국은 어떻고 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말했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를 되짚었으며 한국의 진보정당이 배워야 할 것들을 강조했다.

또, 그의 글은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항상 고백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이상만을 따른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얘기다. 이재영은 늘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자신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많은 운동가의 결기가 아니라 의회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당을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는 늘 강조했다. 아마 그런 현실주의적 태도는 진보정치를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어떤 절실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은 이념적이었다. 그는 늘 다루는 대상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했다. 그 이념이란 당연히 진보정당의 이념일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노동조합 활동의 한계에 갇혀 스스로 진보정치의 거리두기를 선택하는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했고, 때마다 되풀이되는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소위 풀뿌리 운동의 구호에 대해서도 ‘지역의 이익이 결국 어떤 계급의 이익인지 물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것이 어떤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든 궁극적으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갈등이라는 틀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좌파의 세계관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가 글로 보여준 생각들은 그야말로 충분히 좌파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민주노동당의 산 역사와 같은 사람임에도 그가 분당과 새로운 진보정당의 창당에 몸을 던지고 ‘진보대통합’ 논쟁 국면에서도 진보신당에 남기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진보정당운동을 함께 하며 믿고 따랐던 노회찬 의원 같은 사람들과의 결별하는 것은 힘든 선택이었던 것 같다.

죽음이 상징하는 것 

그가 적어도 현재까지로 공적인 공간에 남긴 마지막 글인 ‘노회찬, 주대환을 떠나보내며’에 그런 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그 글에서 ‘내게 주대환과 노회찬은 과학이었다’면서 그들이 진보정당운동을 떠남으로서 ‘이제 나는 내 시대의 과학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밝혔다. 혼돈의 시대에 과학이 없는 자리에 남는 것은 사람의 의지일 것이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다시금 20대 때와 같은 시적(詩的) 혼돈의 시대로 회귀했다. 이태리 시인 잠바티스타 마리노는 “기적이야말로 시인의 목표다”라고 갈파했다. 나는 암흑 속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암흑 속으로의 몇 발자국 만에 그는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서 나는 혼자 한참을 흐느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와 개인적 인연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서글픔의 근원은 내 추억 속의 민주노동당에 관한 것이었다. 이재영은 민주노동당의 역사를 만든 나의 선배들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선배들이 만들었던 민주노동당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재영의 죽음은 이미 끝이 난 민주노동당의 시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만 같았다. 진보정당이 한 때는 국회의원 10명을 가졌고,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대중조직이 배타적으로 지지했으며, 정책연구원만 50명에 달하는 중앙당이 지금은 새누리당사가 있는 여의도 한양빌딩의 2개 층에 걸쳐 있었던, 그런 시대가 이제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자 나는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우리 세대는 이제 광야에 홀로 남겨진 신세가 됐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재영의 죽음은 바로 그 자랑거리의 마지막 한 조각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 할 수는 없다. 이재영이 남긴 글들에서 우리는 그런 직관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다시 세워질 새로운 진보정당은 과거에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한 시대가 저무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남은 자들이 해야 할 것은 이재영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죽음을 직면하는 것을 통해 그의 유지를 잇는 것이다.

이제 다시 산 자들의 시간이 왔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그저 죽음이 아닌, 죽음으로 시작되는 또 다른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채비를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진보는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그의 뜻을 이어 받아 새롭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망설임 없이 돌진해나가야 한다. 

암흑 속으로.

[ 이상한 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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