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원입니다.

 

고지식한 젊은 날을 보낸 것도 아닌데, 내 생애 정당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당원수첩을 받았던 날 서랍에 그걸 넣으면서 느꼈던 가슴 뿌듯했던 기억. 척박한 역사를 가진 이 땅에서 수십 년 동안 투옥과 죽음, 고통과 좌절의 세월을 견딘 사람들 덕에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내가 노동이란 이름을 가진 정당의 당원이 되었구나, 싶어 책에서나 읽었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까지 경험했지요. 내가 비로소 사회적으로도 성인이 된 것 같은 충만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렵니다.

어쨌든 저는 끝내 제 생애 유일한 정당을 제 손으로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냥 어느 날 당이 사라져버렸지요. 역사적 소명을 다 마친 정당의 아름다운 퇴장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누구 하나 맘 편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화려하고 빛나는 무대를 찾아 떠난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우리가 하나였을 때 공유했던 최소한의 가치는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게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예우이자 최대치의 신뢰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 생애 두 번째 정당을 가졌습니다. 노동자 정당이 다시 서는 날 당원이 되겠다던 결심은 잠시 미뤘습니다. ‘진보신당이라는, 이름부터 정체성이 모호한데다 총선이 끝나면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초라한 이 정당에 가입하면서 저는 작은 결심 하나를 했습니다. 예전처럼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당원이 되지 않아야겠다, 내 첫 정당이 사라진 건 나처럼 냉소하고 무기력했던 당원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아직 우리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모순이 많은 나라일수록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 또한 많습니다. 한국 사회는 진보세력에게 그야말로 블루오션이고 물 반 고기 반인 황금어장입니다.

노조 조직률이 10%도 안 되는 나라, 정리해고는 10만 명인데 사회안전망은 제로인 나라, 국경을 넘어 포탄이 오가는 전쟁 중인 나라, 학살의 수괴는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독립군의 자손들은 생계를 비관해 자살하는 나라, 원자로 사고 한 번이면 온 국토가 방사능으로 죽어버릴 나라, 출산율 최저에 여성 성비도 세계 최저인 나라...평등과 생태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토록 해야 할 일이 많은 곳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입니다. 그래서 아직 진보정당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아니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요즘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자꾸 울게 됩니다. 모두가 버리고 떠난 정당, 작아도 의미 있는 정당에서 존재의 의미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해져 버린 정당의 대표를 맡은 홍세화대표의 글입니다. 영원한 척탄병으로 남고 싶었던 평생의 소망을 뒤로 하고 그는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과 함께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자고 호소합니다. 진보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그는, 그리고 우리는 소멸과 해체를 무릅쓰고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소생의 모험을 감수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이 말이 없었다면 어쩌면 저도 주저했을지 모릅니다. 노동자정당이 세워지는 날,다시 벅차게 입당하리라던 제 꿈을 미룬 건 바로 모두가 열매를 따먹는 데만 집중할 때 씨앗을 심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깨달음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달콤한 과실, 원내정당이라는 탐스런 열매, 누군들 그게 탐나지 않겠습니까. 그 달콤한 열매의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이제 씨앗을 심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누린 그 달콤함이 앞선 세대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나봅니다.

내가 사는 동안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걸 고집하지 않을 때 어쩌면 그것은 훨씬 빨리 이뤄질지 모릅니다. 교사들과 공무원의 노동조합 결성,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 남북 정상회담 같은 내가 사는 동안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던 일들이 어느 날 이뤄졌듯, 역사가 발전한다는 믿음만 있다면, 내 다음 세대가 생의 어느 날 좌파정당의 원내입성, 좌파대통령의 탄생 같은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가 무릅쓰고 있는 용기야말로 정말 보람된 일로 남지 않을까요?!

 

저보다 앞서 진보정치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현직 여성청소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가슴 벅찬 역사를 경험하는 영광을 누릴지 모릅니다. 배제된 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의 서사를 국민들에게 들려주는 일 자체가 이미 진보정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입니다.

자신을 해고한 사학의 소유주인 재벌총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할 노동자 국회의원, 제 계급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는 당사자가 국회라는 상징권력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존재를 배반하는 왜곡된 투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귀화한 외국인, 비정규직 운동가, 해고자, 여성 등 우리 안의 타자들이 비로소 정치의 무대에 당사자로 우뚝 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진보정치의 길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습니다.

 

어제 쌍용자동차의 노동자가 또 죽었습니다. 스물 두 번 째 죽음입니다. 경찰과 구청에서는 노동자들이 소박하게 차린 분향소를 막무가내로 부쉈습니다. 분향소마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천대받은 죽음. 삶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 또한 대접받지 못합니다. 죽음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버려진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해온 세상이, 그 하찮은 목숨쯤 스물 둘이나 죽어나간들 무슨 관심이 있을까요. 거창하게 세상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 많이 죽어나가서인지 이제 우리라고 일컫는 사람들마저 무관심합니다. 스물두 번 째 죽음은 하필 선거를 만나 더 철저하게 외면 받고 있습니다. 선거운동에 바쁜 정치인 누구도 분향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기 투쟁하는 노동자들, 해고되어 5년씩, 6년씩 거리를 떠도는 노동자들만이 그 죽음을 지켰습니다.

유일하게, 아직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것도 어색한 진보신당의 홍세화 대표와 당원들만이 분향소를 함께 지켰습니다. 멀리 지방의 유세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올라온 홍세화 대표는 영정 앞에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뒷모습이 너무 처연하고, 천막이나 플랜카드조차 없어 누구의 죽음인지조차 모른 채 무심하게 곁을 지나는 시민들 사이로, 외로운 섬처럼 앉아있는 우리들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내 선택을 다시 기쁜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있다는 사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의 곁에 제대로 있다는 사실,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1500일 넘은 재능의 농성장에, 스물 두명이 죽어나가고 있는 쌍용차노동자들의 분향소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의 광장에, 인민을 수탈하는 금융자본의 점령지에,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심판해야 할 청와대의 앞마당에, 진보신당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국회 입성의 꿈을 당장은 이루지 못한다 해도, 최악의 상황이 되어 우리가 소멸된다 해도,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었음을 우리의 동지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제 생애 두 번째 정당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소멸될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진보신당의 당원입니다.


20120408180113_6578.jpg ▲ 이선옥(나무)

르뽀쓰는 사람입니다. 노동자들이야기..비정규직노동자들이야기..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이야기와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에... 
2010년 전태일문학상 기록문부문에 당선. 전태일문학상수상집 '그대 혼자가 아니랍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공저) '조선 질경이 이소선'(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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